동양 전통에서 성인-군주는 ‘器’와 ‘名’을 관장하여, 예법을 창제하고 이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신성한 인물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성인(聖人)이 글과 문서를 창제해 백관(百官)을 통솔하며 만민(萬民)을 다스리는’ 국가라는 형태를 꾸렸다. 국가에서의 통치란 名을 세우고, 그 명에 따라 禮法을 제정하며 이를 제도와 규범으로 삼아 행사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성호 이익의 [率禮定名]이라는 글이다. 이익은 이 글에서 “법이란 예에 근본하고, 예를 기준으로 법이 제정된다. 이를 어기면 형벌이 있게 되니, 이를 법이라고 한다. 예법에 근본하지 않는 것은 허위가 되니, 예를 제정하는 것은 正名을 핵심으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명론을 세우고 예법을 제정하는 것은 군주임을 증명하는 권위이다. 명론과 예법의 제정 권한은 군주에게 있으며, 명론과 예법의 제정은 군주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器와 名은 남에게 빌려줄 수 없으니 군주가 관장하는 것이다. 名으로 위신을 내세우고, 그 위신으로 器를 지키고, 器로 禮를 갈무리하고 예로 義를 실천하고 의로 이로움을 내고 이로움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통치의 핵심이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은 기물[器]과 명(名)이다. 그리고 명은 사회의 제도와 예법의 근거이다. 이익의 말처럼 명으로부터 예와 법이 산출된다. 상하 신분의 위계를 규정한 예(禮)는 통치의 몸통이 된다. 예를 통해 신분적 상하 위계를 규정하는데, 예는 국가를 유지하는 제도이자 통치의 핵심[政之大節]이다. 예가 적용되지 않는 일반 백성과 하층민에게는 법(法)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예기에서는 명에서부터 예로 이어지는 통치의 실천을 말하고 있다.
"대저 名으로 義를 만들고 義로 禮를 산출하고 예로 통치의 뼈대를 삼고 통치로 백성을 바르게 하니 이 때문에 통치가 이루어지면 백성이 따른다."
필자는 이전의 논문에서 동양 전통 사회의 명론(名論)에 대해, 명론은 단순한 물명(物名)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관한 담론임을 해명했다. 언어구조가 사회구조이기에 공자의 정명론은 예법을 통해 ‘온갖 일들의 질서를 바로잡는’ 한 사회의 제도이자 규약을 회복하자는 논리가 되고, 노자의 ‘무명(無名)’의 세계는 천지의 처음이기에 이 세계는 언어 질서를 가지지 않은 세계이며, 그 세계는 제도와 법, 가치와 규범의 지배가 없는 세계이자 ‘결승이용지(結繩而用之)’하는 세계라고 해명했다.
만약 정공현의 말대로 노자의 ‘無名’이 ‘廢名’이라면, 노자의 소국과민에서 ‘결승이용지’는 서주 시대에 형성되어 노자 당시에까지 이어진 예법에 대한 폐기를 의미한다. 노자의 무명을 폐명으로 읽어낼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가 ‘결승이용지’이다. 결승이용지의 공동체는 기존의 규범과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폐명을 거쳐서 이루어질 무명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허생의 섬에서 허생만이 유일한 사족이었다. 평생 글만 읽어 온 그는 성인의 말씀을 기록한 經과 성인의 말씀을 풀이한 傳을 읽었다. 그러면서도 노자를 읽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덕이 부족하다고 자임하고 문자를 아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섬을 나온다. 스스로 그 섬에서 지배자가 되기를 포기한다. 뿐만 아니라 문자를 아는 사람도 데리고 나온다. 그 결과 허생의 섬을 제도와 규범이 없는 상태, 즉 ‘폐명’의 상태로 만든다.
허생의 본래 계획은 문자를 따로 만들고, 예법을 의미하는 의관 제도를 새롭게 만들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는 문자 만들기와 규범과 제도를 대표하는 衣冠 만들기를 포기한다.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名 제정’을 포기한 것이다. 자신의 덕이 얇다는 이유와 땅이 좁다는 이유를 댄다. 허생은 도적 무리에서 군주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의 그의 의도가 문자 만들기와 의관제도 만들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일들을 그만둔다. 그러면서 문자를 아는 사람들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온다.
허생의 섬을 사회 구조적 관점에서 어떠한 공동체라고 불러야 할까? 아마도 지배자 혹은 지배체제가 없는 공동체이자, 허생의 섬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하는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 공동체일 것이다. 지배자와 지배체제가 없다는 점에서 an-arche[anarchy]한 공동체이고, 구성원들의 공통의지(Voluntary general)가 반영된 규범이 만들어질 공간이기에 아나키즘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폐명이 전제되어야 가능하고, 폐명의 상태에서 결승이용지하는 무명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노자의 소국과민의 사회가 규범과 제도가 폐기되고 결승이용지를 하며, 성인인 군주까지 배제된 공동체라면, 이 공동체는 무명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허생의 섬 역시 규범과 제도가 폐기된 공동체이며, 군주 역할을 할 사족인 허생과 문자를 아는 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공동체이다. 허생의 섬 역시 폐명을 거쳐 어떠한 예법도 제도도 없는 무명의 공동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