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우, “자화상”, 인디아 다폴리 해변, 2011

바다는 쉬지 않는다. 지구의 들숨과 날숨처럼 밀물과 썰물이 하루 두 번 교차한다. 모래에 작은 웅덩이를 파고 지켜보다 나를 닮은 사람이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물론 우연의 일치지만 어떻게 사람형상이 거기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해수가 그려준 나의 얼굴이다.

문명 이전의 인류는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살았을까? 고대의 유적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인도 북서부 해안 오지를 여행하며 예술유목을 할 때였다. 하루는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따리나무’의 수액을 채취하는 젊은 친구가 다가와 “당신은 어느 동네서 왔나요?”라고 물었다. “응, 나는 한국이라는 동네서 왔지!”라고 대답했으나 그 친구는 고개를 갸웃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수액 채취하는 젊은이의 세계관은 아마도 그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구석기 동굴 탐험가를 놀라게 했던 웅크린 들소 이야기가 생각난다. 수만 년 전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처럼 공간과 조명 그리고 시각효과 등을 고려하며 작업을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가 그들을 미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보다 폭넓은 지식과 경험,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많은 도구가 새롭게 등장하여 세상을 바꾸더라도 자연 자체의 질서는 지배할 수 없다.

나는 일찍이 자연 속에서 작업하며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깨우치는 즐거움을 얻었다. 나아가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신념도 생겼다. 처음 시작은 자연미술에 관한 문서도 서적도 없고 경험자마저 없었기에 오로지 자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우군이 있었다면 외롭게 현장연구를 같이 했던 소수의 동료 회원들이 유일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가거나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큰 시각에서는 같은 경험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주된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미술은 창작, 감상, 비평이 소통의 기본이다. 이 구조의 핵심 요소는 작가와 작품 그리고 감상자다. 작가와 감상자가 만날 때 작품은 자연스럽게 작가의 창조물 또는 소유물이 된다. 즉 주거니 받거니 거래하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서 작가가 작품에 우선하는 것은 물론, 언제나 창작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나의 자연미술 작업에 있어서 나와 작품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로 인식된다. 자연이 이미 어느 정도의 미적 상태에 도달해 있고 나는 이를 활용하여 완성된 상태로 진행할 뿐이라는 겸손한 생각이다. 따라서 자연미술의 과정에선 현장을 크게 변형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약간의 인위적 손길을 더하거나 나의 손길로 자연물 오브제들을 재구성하더라도 각각의 오브제가 지닌 순성(純性)과 질서를 최대한 고려한다. 그리하여 각각의 작품들은 본래 자연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해 그 아름다움과 질서를 전하는 한 편의 시와 같으며 관객들은 나의 작품을 통해 자연을 보게 될 것이다.

나의 작업은 전 과정을 통해 가능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저절로 되는 이치)의 전통적 개념을 존중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은 물질문명의 인간중심 세계관을 극복하고 자연을 공존의 대상으로 인식해 서식이 가능한 지구환경을 보존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저들과 호혜적 관계를 복원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해방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다.

아응우, “절정의 순간을 위해(For the Moments of the Climax)”, 리투아니아, 2017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 모든 생명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한 삶이다. 물론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만물은 죽기 위해 살지 않는다. 그리고 종의 보존을 위해 교배하고 씨를 남겨 후사를 도모한다. 해가 짧은 늦가을 마당의 잡초는 촉이 트자마자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다. 많은 동물이 생사를 건 경쟁을 통해 암놈을 차지하는 것도 건강한 씨를 남기려는 위대한 자연의 질서다.

나의 “절정의 순간을 위해”는 범 자연계 안의 음과 양, 남과 여, 암컷과 수컷 사이의 숭고한 사랑과 교배에 관한 서사적 내용을 시각적 기호화한 것이다.

‘미술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해방’이라는 획기적 전환은 수 세기에 걸쳐 공고한 토대를 구축한 ‘자본주의’와 ‘인간중심 세계관’에 부딪혀 수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했다. 그러나 위기의 자연 앞에 물러설 수 없으므로 오늘 또 도전장을 낸다.

2023. 10. 이응우

이응우, “법륜(A Buddha’s Wheel), 러시아 블라즈미르, 2007

모스크바의 인쇄예술대학 초청으로 블라즈미르의 숲에서 작업을 했다, 그때 울창한 소나무 숲, 갈색 모기, 자작나무 숯불구이, 보드카, 빅트로 초이, 나타샤 등 잊지 못할 추억들이 생겼다. 이 작업이 첫 법륜이었으며, 나의 평생 계속되는 작업 중 하나다. 작업의 의도는 부처의 자비와 함께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