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관련된 영화 중 가장 인상 깊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은 로빈 윌리엄스의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죽은 시인의 사회(1990년)를 떠올린다.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 윌튼 아카데미엔 공부가 전부인 아이들이 모였다. 모두 명문대에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이곳에 영문학을 가르치는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엄스)과 우등생이지만 각기 마음속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넘치는 아이들과의 이야기를 다룬다.
키팅 선생님은 윌튼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새로 부임하며, 아이들에게 내면에 있는 자신의 의지를 꺼낼 수 있는 수업을 한다. 시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담은 구절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찢어버리는 장면, 선생님을 캡틴으로 부르라 하는 장면 등 지금 봐도 명장면이 많다.
“너희들은 각자의 걸음걸이와 보폭이 있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우리에겐 인정의 욕구가 있다. 너희 스스로 믿어야 한다. 타인이 너희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라도. 너희 스스로 걸어라. 보폭과 속도 방향 모두 너희 마음대로 정해라.”
키딩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걸음걸이를 빗대어 각자의 발걸음에 맞는 삶을 살도록 일깨운다. 특히 우등생이었던 형의 그늘에 가려, 늘 소심했던 토드(에단 호크)에게 내면의 욕망과 불안 그리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시를 읊조리게 한 장면도 일품이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 최선을 다하자. 오늘을 즐기자의 뜻으로 쓰는 아이들에게 카르페 디엠의 정신을 늘 강조했던 키딩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것은 닐 페리(로버트 숀 레너드)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우등생이면서 의대에 들어가길 강요받던 페리는 이런 자신의 처지가 싫었다. 그러던 중 키딩의 카르페 디엠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리라 마음먹은 계기가 되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연극 주연배우를 맡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페리를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뜻을 꺾으려 하자 자살하고 만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당시 미국 사립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던 권위주의적인 교육 현실의 폐해를 바탕에 다루고 있었고, 입시에 찌들려 있던 한국의 교육 현실에도 흔히 벌어지던 탓에 많은 이들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교육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의 인생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와 키딩 선생님을 꼽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차쌤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보면서도, 그 속에 담긴 학교와 교실과 교사와 아이와 심지어는 부모에 대한 장면을 분석하면서도 유독 죽은 시인의 사회 만큼은 평을 하지 않았다.
난 죽은 시인의 영화를 개봉한지 10년도 넘어 봤다. 좋은 영화란 사실에 이견은 없다. 그러나 죽은 시인의 사회가 영화가 아닌 영화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고 주인공 키딩 선생님에 대한 인식 과대포장 되거나 혹은 교육을 바라보는 욕망에 따라 확대 해석된다는 점에서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
“차쌤을 보면 키딩 선생님을 보는 듯해요”
20년 전부터 영화 수업을 하던 나는 주변 동료 교사들로부터 이런 말을 가끔 듣곤 했다. 그럴 때마다 왜 그런지 물어본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수업하잖아요. 전 그렇게 못해서 늘 불만이었는데 선생님이 수업하는 걸 보면 자료나 대본도 없이 어떻게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가지고 그 의미를 파악하시는지 궁금했어요.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요?”
난 천성적으로 짜 맞춘 수업을 하는 것이 어색하다. 그러니 당시 수업깨나 한다는 교사가 도전했던 수업연구대회엔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대신 영화란 텍스트는 아이도 좋아하고 교사인 나도 좋아했다. 글에 비해 상대적으로 몰입도는 높은데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상 텍스트의 특성을 이용해 각자 본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풀어내다보면 키딩 선생님이 하듯 아이들의 마음속의 불안과 욕망을 자극해서 영화 속 이야기를 자신과 우리들의 이야기로 풀어냈을 뿐이다. 그 형식이 자유롭게 보였을 것이다.
나의 영화 수업이 키딩 선생님의 수업처럼 아이들의 욕망을 끌어내는 수업처럼 보였다해도 난 키딩 선생님이 아니다. 난 키딩 선생님의 수업방식을 존중한다. 하지만 방식이 거칠었다. 그리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 좀 더 책무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의 내적 욕망의 자극하고 불안을 잠재우는 수업방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키딩 선생님의 능력은 지금의 교육현장에서도 큰 자극이 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자유를 꿈꾸게 하려면, 그만큼의 책임도 따른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다.
아이들을 기름과 같다. 기름은 불꽃만 닿아도 불타오르는 휘발유부터 높은 온도로 열을 가해야 비로소 불이 붙는 중유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공통점은 휘발유든 중유든 불이 불지 않을 땐 그냥 액체다. 아무 반응도 없고 열도 내지 않는다.
불이 붙고 나서가 더 중요하다. 불은 인류 문명을 창조하는데 큰 역할을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지만, 잘못 조절하면 주위를 불태우고 잿더미로 만들 만큼 파괴력이 크다.
용광로의 불과 난로의 화로가 달라보여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각자의 가치가 있듯, 조절력은 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의 열쇠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불을 지펴야 할 때가 있고, 불을 줄이거나 심지어는 꺼야 할 순간도 생긴다.
윌튼 아카데미는 입시를 위한 학교였다. 과연 키딩 선생님은 그걸 모르고 갔을까? 예전 졸업생이었던 키딩 선생님이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좀 더 세심했어야 했다. 적어도 자신의 교육관을 펼치려면 주변의 동료교사들의 협조를 얻어야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다른 교사들은 모두 입시에 치우친 교육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학교 현실을 보면 그런 속에서도 키딩선생님의 교육방식도 존중하는 동료들은 존재한다. 그들과 연대해서 조금씩 뜻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난 닐 페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장면에서 키딩 선생님의 교육적 의도는 인정하면서도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앞서 말했듯 키딩 교사를 바라보는 관객 또는 사회의 시선이었다. 난 교사를 하면서 이것이 더 깊고 무겁게 다가왔다.
키딩 선생님의 태도는 교사가 가져야 할 큰 자질을 가지고 있다. 바로 아이를 이해하고, 끼를 발견하며, 그것을 밖으로 표출 될 수 있도록 끄집어내는 능력은 대단하다. 그러나 모든 교사를 키딩 선생님으로, 키딩 선생님처럼 하길 바라면 안 된다.
한 개인을 봐도 자신의 감정 안엔 냉정과 열정이 조화를 이뤄야 하듯, 학교의 교육과정을 이끄는 교사도 좀 더 냉정을 유지하는 교사와 좀 더 열정을 끌어올리는 교사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냉정은 차분함으로, 열정을 활발함으로 유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영향을 받으면서도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냉정이 지나쳐 메마르게 되거나 열정이 지나쳐 타버리지 않도록 하는 균형은 이뤄야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1990년 그 당시 열광적이었던 이유가 냉정으로 대표되는 차분함이 열정을 막을 정도로 차가웠다면, 그래서 그 얼음장 같은 학교의 아이들의 마음을 녹이고 불을 지필 키딩 선생님이 필요했을 것이다.
과연 지금의 학교 현장에 키딩 선생님이 필요한가? 아니다. 이미 많은 키딩 선생님이 존재한다. 적어도 그 당시보다 지금이 더 많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과거 키딩 선생님의 역할을 했던 나조차 지금은 차분함을 기반으로 냉정 쪽에 가까운 수업을 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바뀌었는데 키딩 선생님을 기대하고 꿈꾸는 것은 교사집단이 아닌 아직 학교가 구시대에서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지금의 학교는 전혀 변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아이들의 꿈과 희망 따윈 상관없이 성적과 입시에 목을 맨 집단이라 매도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시켜 줄 영웅을 찾는 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진짜 빌런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들을 도구처럼 여긴 닐 페리의 아버지다. 지금은 그 욕망을 숨긴다. 그리고 아이를 위한 교육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하지만 교육을 위해서란 미명하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교육을 흔들려는 자들이 아직도 학교를 불신하면서 겉으로는 키딩 선생님을 찾는다면 그들이 교육을 망치는 진짜 빌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