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재작년에 정년 퇴임을 하신 우리 학교의 선배 교사는 두뇌가 명석한 분이었다. 왜 그런 사람이 있잖은가! 무슨 일을 하던 탁월하고 샤프하게 처리하는 일머리가 뛰어난 분. 지어진 지 30년이 넘는 우리 학교는 오래된 학교가 으레 그렇듯 협소한 주차 공간으로 매일 골머리를 앓는다. 학교 건물 앞뒤 공간의 양옆으로 차를 빽빽이 주차해서 자칫 늦게 오면 인근 아파트로 가야 할 지경이다. 코로나가 끝나고 외부 강사들을 열두 명 초청해서 진행해야 할 행사를 준비하다 강사 차량의 주차 문제로 고심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선배님께 여쭤보았다. 방법이 있었다. 그리곤 우리를 잘 따르는 젊은 후배 교사에게 이런 경우 어찌할지 문제를 내보았다.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치르는 직무적성검사에 출제할 만한 문제라며 말이다.
기본을 배우고 실전 문제를 풀어야 한다. 쉽고 편한 방법만을 추구하면 큰 문제를 풀 수 없다. 매사 해결책을 구함에 있어 정석(定石)부터 배우고 상황에 맞는 유연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우린 그렇게 배워왔다. 그래서 정도를 걷는 과정보다 약식, 또는 간단한 방책을 폄훼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무시당한 대표적 사고 유형을 ‘잔머리’라고 불렀다. 그마저도 일말의 존중이라면 더 담백하게는 ‘잔대가리’라고 표현해야 맞다. 통상 잔대가리로는 롱런할 수 없다며 임시방편이나 땜빵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일 처리를 배워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심연에 감추어진 우직한 방식보다 때론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절묘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잔머리’만의 매력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나. 오늘은 몇 가지 사례로 일의 묘미를 밝혀주는 잔머리들을 찬미하고자 한다.
새 학기를 맞아 학부모 상담 주간을 준비 중이다. 교문 위에 걸릴 현수막도 준비한다. 올해부터는 사람이 직접 올라가서 현수막을 설치하는 위험천만함을 겪지 않아도 된다. 체인으로 연결된 현수막 걸이에 걸어서 감아올리면 된다. 현수막을 제작한 후 설치는 우리 학교 시설 주무관님께 부탁드렸다. 하루가 지나 현수막을 보았다. 팽팽히 잘 부착된 현수막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연일 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다. 미처 생각지 못한 센스가 발휘된 그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복도에서 주무관님을 만나 감사 인사를 드리며 구멍이 원래부터 있었는지 여쭤보았다. “무슨, 제가 임시로 만들었지요!” 우리 학교 주무관님도 일머리 하나만큼은 독보적인 분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빛나는 주무관님의 ‘잔머리’로 강한 바람에도 현수막은 찢어질 일이 없다.
지금은 학교에 플로터가 있어서 신학기면 각반 시간표를 출력하여 게시하지만, 예전에는 학기 초에 모 대학에서 학교 시간표 파일을 얻어 간 후 모든 교실에 큰 시간표를 틀까지 만들어서 붙여준 일이 있다. 예쁘게 디자인된 해당 학급 시간표 아래에는 그 대학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나는 입시 설명회를 다닐 때마다 대학들이 만들어내는 그 부질없는 학교 홍보 책자보다 시간표를 제작한 사람의 ‘잔머리’에 경의를 표하곤 했다. 아마도 입학홍보처에서는 그 아이디어를 낸 직원에게 적절한 포상이 있었으리라. 아이들이 최소한 한 학기 동안 매일 그 대학의 이름을 보게 되니 실제로 원서 접수 시기에 학교 이미지 개선에도 기여한 바가 있었다. 응용 사례로는 대학 이름이 박힌 거울이나 시계가 있다.
신규 교사 때부터 상조회 총무를 했다. 그동안 총무 여섯 번, 회장 세 번. 나만 고생할 수 없어 후임 회장이나 집행부를 뽑을 때마다 비장하게 유혹하며 말한다. “교사는 두 종류로 나뉜다. 상조회를 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결혼을 못 하고 나이를 먹어가던 중에 다른 사람 결혼식마다 참석하는 건 고역 아닌 고역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누님으로 모시던 선배 교사가 교장 선생님이 되어 아들 장가를 보낸 날이었다. 약간은 격조가 있는 호텔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나는 오랜만에 정장을 빼입고 지하 주차장에서 트렁크에 당연히 있을 구두가 없는 걸 확인한 후 망연실색하였다. 운전은 학교에서 신던 슬리퍼를 신고 했다. 신경 써서 빼입은 정장에 슬리퍼 차림으로 호텔 결혼식장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제대로 갖춰 입은 하객들은 슬리퍼를 신고 당당히 걸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교장 선생님에게 축하 인사를 하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축하드려요, 교장 선생님~! 근데 죄송합니다만 제가 발가락이 다쳐서 부득이 슬리퍼를 신고 왔네요.” 눈치가 빠른 교장 선생님이 웃다가 약간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옆에 있던 사부님은 감동하신 듯 두 손으로 나를 잡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몸이 불편한데도 식장에 오셨다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그동안의 학교생활에서 만난 선생님 중에 ‘잔머리’가 유독 뛰어난 분은 ‘생물(현 생명과학)’ 교과 선생님이 많았다.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에서 온 견해이다. 아마도 문·이과를 관통하는 가장 통섭적이고 융합적인 교과라 그런 사고의 유연함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절친인 선배 교사 역시 생물 선생님이었다. 한번은 정기 고사를 앞두고 전체 교직원 회의가 열렸다. 당시에는 부정행위를 방지하고자 학년별로 반반씩 섞어서 시험을 봤다. 1학년 학급 인원의 절반이 2학년으로, 2학년은 3학년으로, 3학년은 1학년으로 이동하여 섞었다. 문제는 1, 2학년은 열한 반으로 학급수가 같았지만, 3학년이 열두 반으로 한 반이 더 있어서 발생했다. 당시 교무부장님은 학급을 어떻게 이동해야 할지 고심 끝에 회의가 끝난 차후에 알려주겠다며 얼버무렸다. 이때 절친인 선배 생물 선생님이 손을 들었다. 몇 번 쓱싹쓱싹 그리며 고민하더니 해법을 말했다. 바로 3학년 12반을 2학년 11반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들어갈 1학년 11반을 3학년 12반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었다. 간단한 퍼즐이지만 경직된 사고에서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은 해법이었다. 비로소 ‘잔머리’가 빛을 발하는 모습이었다.
‘잔머리’는 경쾌하다. 그걸 발휘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는 정도도 약하다. 그래서 주위를 밝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잔머리 역시 거저 나올 순 없다고 믿는다. 해당 문제에 천착하여 평소에 품어 두었던 정성들 가운데 어느 순간 새어 나오는 부산물 같은 것이라고 본다. 어쩌면 잔머리들이 모여서 큰 문제들마저 해결되어 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무시할 수 없는 역량이자 축복이다. 딱딱하고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업무를 부드럽게 해주는 수많은 ‘잔머리’들을 찬양한다. 그리고 그런 잔머리를 발휘했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동료 교사들에게서 뿐만이 아니다. 중학교 아이들이 무슨 작업을 할 때 해맑게 웃으며 “선생님, 이렇게 해보면 안 될까요?”라고 제안하는 그 잔머리에는 참신함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리하여 변칙과 꼼수라 비하될지언정 우리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돌파구로 안내하는 신선한 잔머리가 오늘도 어딘가에서 출현할지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 업무를 대하려 한다.
참, 서두의 주차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냐고? 나는 인근 아파트나 공용 주차장의 협조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선배의 말을 듣고 방법을 달리했다. 어차피 가운데 통로 길은 비어 있으므로 행사가 진행되는 오전 수업 시간만 차량 이동을 하지 말아 달라는 사전 안내를 하고 강사들의 차량을 3중 주차했다. 가운데 길은 무조건 비워놓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면 되는 것이었다.
출처 게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