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호 교수의 노자 이야기/ 노장(老莊)’에서의 아기(赤子) 메타포(metaphor) 7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3.09.20 06:15 | 최종 수정 2023.09.20 06:34 의견 0

경기대학교 교수

7. 증명

노장에서 ‘아기’는 온전한 삶(全生)을 사는 사람에 대한 메타포이다. 노장에서는 養形을 위한 攝生들은 부정된다. 따라서 복服餌와 呼吸, 導引術 등을 통한 長生과 不死에의 추구를 비판한다. 다만 자연의 도를 따르는 삶을 온전한 삶(全生)이라고 규정한다. 자연의 도를 따르는 삶은 養形에 있지 않고, 養神에 있다고 주장한다. 양신은 온전한 삶(全生)의 길인 것이다.

그렇다면 <노자> 50장의 “선섭생자”에서 ‘섭생’의 의미는 정신적인 의미로 읽혀야 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섭생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일 수 있다. 육체적으로 음식을 먹는 것, 호흡을 하는 것, 도인술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것, 계절에 따라 적절한 起居를 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정신적인 측면도 포함된다. 정신을 기르는 것 역시 섭생 중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本草衍義>(이 책은 필자가 저본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서유구의 <보양지> 권1에 기록된 것을 본 것이다)라는 책에는 섭생이 정신을 기르는 것까지 포함된 정의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양의 뜻에 대해 그 이치는 만 가지에 이르지만, 요약하여 말하면 그 수법은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 정신을 기르는 것이다. 둘째, 기를 아끼는 것이다. 셋째,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다. 감정을 잊고 지혜를 버리며, 담담하고 텅 비게 하며 세상일에서 벗어나 참됨을 온전히 하라. … 정신이 안으로는 생각에 소모되지 않게 하고 외부로는 유혹되지 않게 하여 참됨과 하나가 되어 떨어지지 않으면 신은 저절로 편안해지니, 이것이 정신을 기르는 것이다."

만약 <노자> 50장의 섭생이 정신적인 것이라면, <장자>의 편들에서 보이는 양신과 포신은 ‘선섭생자’의 섭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노자> 50장의 마지막 구절의 의미는 분명해졌다. 왜 아기가 섭생을 잘 하는지, 왜 섭생을 잘하는 자들이 죽을 곳이 없는지에 대한 의미가 분명해졌다. 결국 “선섭생자”는 養神을 잘 하는 자를 의미한다. “죽을 곳이 없다”라는 의미는 아기처럼 매일을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아기는 생을 생으로,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천행을 하는 것이다. 설령 아기가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는 물화한 것이 될 것이다. 이는 “聖人은 살아서는 天行하고, 죽어서는 物化한다”라는 것과 그 의미가 같다.

아기를 보아온 사람은 아기 매일 조금씩 달라져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것이 <장자>에서 말한 “나날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과정(更生則幾矣)”이 아닐까? 이는 정신적인 의미에서 나날이 새로운 삶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질곡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는 아기 혹은 어린아이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마18:1-14)고 했다. 물론 예수의 말도 메타포이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의 메타포로 어린아이를 제시했다. 천국은 영원한 삶을 사는 곳이고, 그곳은 어린아이같이 될 경우에만, 오직 그럴 경우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노자는 남영주에게 어린 아이같이 될 수 있느냐(能兒子乎)고 물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육체적인 삶, 웰빙에 골몰하여 기공과 요가 등을 수련하는 단체가 즐비하고, 온갖 먹거리가 넘쳐 나는 삶에서 우리는 과연 정신을 기를 수 있을까?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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