氣는 道의 몸체인가?
한자 氣는 기운을 뜻하는 气와 쌀 米가 합쳐진 형성자다. 쌀 米가 있어서 해석이 매우 다양하지만 쌀이 밥이 될 때 나오는 수증기를 氣로 보는 의견이 많다.
즉 氣는 고정된 형태를 가지지 않는 부정형의 事態를 의미하며 동시에 그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모든 비 물질적 비 형태적 상황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기도 한다.
따라서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서양 철학에서 이렇게 모호한 의미를 가진 氣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이 방향을 외면하게 되었는데 아주 최근에 와서야 약간의 관심을 표명하는 분위기다.
물론 서양 고대 철학에서 Physis(통상 ‘자연’으로 풀이함)가 비슷하게 사용되고는 있는데 이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작용하는 사물의 본성’(고대 희랍철학에서의 Nomos와 Physis의 의미 탐구, 한국윤리교육학회, 2009, vol., no.18, 145쪽) 정도로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오히려 Logos의 의미에 통섭統攝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동양 철학에서 氣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논의의 결과 거대한 대양이 되어 지속적으로 우리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도덕경 42장에 이르기를,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冲氣以爲和.(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도에서 하나가 생기니 하나는 둘이 된다. 둘에서 셋이 생기고 셋으로부터 만물이 생겨난다. 만물은 음陰을 짊어지고 양陽을 끌어안아 기운이 가득하니 이로써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말하는 道가 바로 氣다. 즉 氣로부터 만물이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이 말은 儒家의 主理, 主氣의 이야기가 생겨난 연원淵源이 된다.
또 도덕경 21장에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도지위물, 유황유홀 홀혜황혜, 기중유상 황혜홀혜, 기중유물 요혜명혜, 기중유정)
도라고 말하는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혹은) 없는 듯 있는 듯. 그 가운데 형상이 있고 (그 조차도) 있는 듯 없는 듯. 그 가운데 사물이 있고 (사물은 있으나) 그윽하고 가물거리니, 그 가운데 정(기, 혹은 도)이 있다.
역시 주어는 道이나 실상은 氣를 설명하는 말이다. 여기에 氣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精이다. 여기에 쓰인 精에 대해서는 『管子』(관중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책) 내업內業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精이란 氣의 精이다.” 즉 노자가 말하는 精은 氣의 핵심인데 그것이 곧 사물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道를 설명하는 것으로 氣, 氣의 핵심으로 精을, 그것들이 다시 뭉치고 흩어지면서 천지가 이루어졌다.”(논형論衡-후한後漢 왕충王充이 지은 책 담천談天) 즉 논형에서는 천지의 원인으로 氣를 이야기한다. 여기에 반드시 부가附加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形이다.
形은 精의 반대에 서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42장의 道는 氣와 形이 조화된 형태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앞서 21장에 설명한 道를 보충하기 위함이다. 결국 道의 몸체는 氣이고, 氣는 精인데 精으로부터 形이 성립한다. 形은 象이니 이 둘의 조화가 변증적으로 다시 道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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