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주초등학교 교사)
교장, 교감은 다 교실에서 가르친 교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교장 교감의 관리직, 장학사, 장학관의 장학직으로 넘어가면 생각이 바뀐 경우를 많이 본다.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려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알아야 대책도 생각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교육 현장을 바라보는 구성원의 질은 높아졌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다. 관리직, 장학직도 예전에 비해 자질이 높다. 승진의 구조와 담론이 과거에 비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어보여도 그 속에서 승진의 길을 걸어가고, 승진한 이들의 생각은 두 가지 지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하나는 교육자로서 모나거나 뒤떨어지진 말아야겠다. 다른 하나는 교육을 위해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교사가 과거에 비해 뭐가 달라졌냐는 세간의 시선과 맞물려 논의는 뮈비우스 띠에 갇힌다. 이런 생각을 가진다고 해서 역할을 잘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평가가 엇갈린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괜찮은, 혹은 잘하고 싶은 관리직과 장학직이 교사를 위하고, 교육을 위한다고 하는 그 많은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해를 사거나 심지어는 욕을 먹는다.
복잡한 것은 간단하게 풀어봐야한다. 학교를 보자. 교장, 교감과 교사는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그런데 교무실과 교장실은 교감, 교장이, 교실은 교사가 점유한다. 점유하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서로 다 공유되지 않는다. 여기서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과 정보의 차이가 생긴다.
관리자는 학교의 많은 정보를 가진다. 교육청에서 오는 행정정보를 비롯한, 교사들의 모든 인사정보의 열람과 공,사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 각종 위원회의 장은 교장, 교감이 당연직인 경우가 많고, 거기다 학부모와 학운위 등 학부모와 공식 비공식 접촉이 많아진다. 지역 단체, 사회, 동창회까지 교사와 비할 수 없는 수 많은 정보와 인사와 교류하며 정보의 비대칭성은 커진다.
그래서 교사와 대화에서 이런 말을 흔히 한다. “내가 교사 시절에는 몰랐는데 ~~~”. “교사들이 뭘 몰라서 그런데~~~~”, “교사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직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나, 아이를 교육하는 현장의 전문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장, 교감과 만났을 때, 경력이 26년이나 되는 나도 이런 논리를 펴는 관리자와 대화에서 동등한 입장에서 전문가로 자리매김 하기 어렵다.
예전에 비해 이런 관리자가 더 상호작용이 곤혹스러운 이유가 있다. 과거에 비해 겉으로는 친절하고, 절차적인 회의 등의 민주절차를 갖추고, 비대칭적인 정보 독점이 있기 때문에 직위의 권한을 들먹이지 않고서도 충분히 우월적 관계형성이 가능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관리자는 그 정보를 다 알지 못한다. 놀이시간, 점심시간 운동장, 복도에서 신나게 놀고 온 아이가 교실에서 어떤 모습을 보인는지는 교사만 알고 있다. 밖에서 괜찮아 보이던 아이도 수업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하는 것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차쌤은 내 선생님 아니에요” 작년에 체육관에서 차샘과 대판 싸우고 씩씩거리고 가던 아이가 있었다. 체육관을 박차고 나거던 아이를 붙잡지 못해 뒤 따라 갔다. 뭔 짓을 저지를 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지나가던 학부모와 상담교사를 보자 깍듯하고 밝게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올해는 사물함 안에서 우유를 보관하다 썩어 냄새가 나는 아이가 있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먹기 싫어 사물함에 넣어뒀다가, 처리 못하고 시간만 보내다 냄새가 사물함 밖으로 퍼지자 알게 되었다. 아이와 치우고 정리하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이것 저것 지도한다. 이걸 관리자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물어보지 않는 것은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교사가 이런 건 알려주고 대책을 함께 세워야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현장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이런 것을 언제든지 알리고 관리자, 교사, 학부모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할 수 있었다.면, 교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지도의 권한을 인정하고 따랐다면 지금 이런 글을 쓰지도 않는다.
- 학교 일은 학교에서, 집 일은 집에서
부모와 교사의 역할을 정하고, 과제분리를 주장하는 차샘마저도 쉽지 않다. 관리자가 물어보지 않는 한 교실의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다. 전문적 학습공동체, 다모임이 있지 않는냐고 한다면 이것 역시 전부는 아니다.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두가지만 물어보면 된다.
“교실살이가 늘 의제의 제1우선인가?”
“의제는 교사가 선정하는가?”
교실 살이가 우선이 되지 못하고, 상정된 의제를 논의 하는 것은 절차적 민주성만 획득한 것 뿐이다. 이럴 경우 교사는 입을 다문다. 그럼 교실과 유리된 논의가 흐르고 만다.
- 대책에 대해 말을 아낀다.
이건 각급 학교마다 사정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것은 학교와 교실 현장도 마찬가지다. 다른 학교와 사례가 좋다고 해서 해봐도 안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시각차가 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 뭐가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보자. 교육은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만, 교실과 수업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 이것을 부정하면 시민교육의 장으로서 공교육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교실을 중심으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친다. 등잔 밑이 가장 어둡듯이 학교 안에서도 교무실과 교실, 교장실과 교실의 거리가 가장 멀 수 있다.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심리적인 거리다. 이것을 좁히는 것이 지금의 관리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 신문사의 공식 입장은 아닙니다. 교육에 대해서, 교육의 각 주체의 협력 방안에 대해서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반론 또는 보론이 있으면 이것도 함께 실겠습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