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민(작가, 초등학교 교사)
이건 나의 이야기다. 일반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겪은 것도 있으며, 내 주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교육부 장관 인선 문제로 어수선할 때 난 나의 이야기로 대신한다. 요즘 학교에선 교사보다 학부모가 더 강한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교사로서의 경력이나 수업의 전문성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불편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부모는 곧장 학교에 전화를 건다. 때로는 관리자까지 찾아가고, 교육청도 찾아간다. 고래고래 고함 지르기는 예사이고, 예의를 갖춰 차분히 말하는 부모를 찾기 어렵다. 심하면 지역 언론에 제보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아이가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학교는 더 이상 교육의 공간이 아니다. 고객센터가 된다. 언제부터 학교가 이런 곳이 되었을까. 사실 오래전부터 그랬다. 요즘이 더 커진 것 같이 보여도 예전부터 진상부모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 수위가 더 높아지고, 예측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온 것은 학교폭력예방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나서다.
나는 예전에 학교와 가정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고 믿었다. 부모는 교사의 말을 듣고, 교사인 나는 나의 삶을 내어놓고 아이의 삶을 부모와 공유했다. 때로는 오해가 있어도 결국 서로를 신뢰했다. 아니 신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느 순간 학교는 서비스 기관이 되고, 교사는 서비스 직이 되었으며, 학교와 교사에게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교육적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수요자 중심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원래 수요자 중심 교육이 나쁜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요자는 아이와 학생을 지칭한다. 교육을 받는 수요자의 관점에서 교육을 설계하는 것 자체는 의미있다. 최소한의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을 제외하고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맞는 교육을 하자고 하는데 마다할 교사는 없다. 하지만 수요자 중심 교육이 그 부모의 권리처럼 여겨질 때, 여기고 있을 때, 학교는 난장판이 된다. 부모는 교육의 수요자가 아니다.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말은 겉으로는 민주적인 가치처럼 보이지만, 실제 학교 현장에선 ‘내 아이의 불편을 즉시 해결하라’는 명령으로 기능한다. 교사의 교육 철학이나 아이의 사회적 맥락은 무시되고, 단편적인 결과만으로 교사의 책임이 논의된다. 공교육의 본질은 사라지고, 학교는 점점 서비스 제공 기관처럼 취급된다. 소비자 중심이라는 프레임은 학부모의 요구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사는 더 이상 ‘교육하는 사람’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슬프게도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상처받는 건 아이들이다. 그토록 아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는 부모는 이걸 꼭 알아야 한다. 초등3-4학년만 되어도 아이느 학교에서 난리치는 부모를 부끄러워한다. 이걸 아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고 믿는 부모와 그 아이는 발전 가능성 제로다.
하지만 아이는 다르다. 아이들은 미숙하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미숙함을 자각하고, 실수를 통해 배워가며 서서히 성장해간다. 교사는 그 여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돕는 사람이다. 아이가 친구와 다투고, 울고, 후회하고, 다시 용기를 내는 과정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성장의 순간이다. 특히 관계와 사회성이 약한 아이일수록 이 모든 일이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교실은 아이가 실패해도 괜찮은 곳이어야 한다.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는 사람이 교사이고, 친구여야 한다. 이 과정은 아름답지 않다. 교사는 부모처럼 아이를 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팽겨친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때를 쓰거나, 핑계를 대거나 할 때 못하게 하고 할 때 까지 기회를 주고 기다린다. 이때 못견뎌하는 아이가 나오더라도 교사도 끝까지 버텨야 성장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성장의 한가운데서, 부모가 개입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아이가 실수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다 ‘막아야 할 일’로 본다. 미숙하니 보호해야 한다는 이름으로, 실패의 기회를 차단한다. 아이의 말만 듣고 상황을 단정 짓고, 학교를 향해 문제를 제기한다. 아이는 당연히 자기 입장에서만 말할 수밖에 없고, 부모는 그 말만 듣고 불타오른다. 이때 교사는 이미 설명의 기회를 잃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부모가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내 아이를 지키는 게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다. 그 믿음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아이가 경험해야 할 자율성과 사회적 조율의 기회를 박탈한다. 실수와 실패를 스스로 감당하고 복구해보는 경험이 없으면, 아이는 외부 탓만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부’는 늘 교사다.
여기에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가 더해진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학교에 자주 드나드는 학부모들, 특히 운영위원이나 봉사위원, 급식 모니터링 담당자는 교사보다 관리자와 더 자주 접촉한다. 자연스럽게 관리자에게 교실에 대한 단편적 이야기들이 전달된다. “그 반은 분위기가 좀 불안해 보여요.” “○○ 선생님은 좀 무뚝뚝하시더라고요.” “우리 반 학부모들은 불만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이 짧은 말들이 교실 안에서 교사가 수십일 동안 쌓은 관계와 수업의 맥락을 단숨에 흔든다. 문제는 관리자들이 이런 이야기에 의외로 쉽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민원에 예민하거나,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관리자일수록 교사의 지도방식을 비틀어 바라보기 시작한다. 결국 교사는 자신이 정성껏 지도하고 있는 교실에 대해 스스로를 해명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교사의 권위는 아이들 앞이 아닌, 교실 밖 말들에 의해 침식된다. 그 순간 교사는 다시 한 번 무너진다. 관리자의 무능과 무관심 혹은 편향이 부모와 결합되면 학교는 순식간에 붕괴된다.
나는 과거 부모와의 관계가 남달랐다. 그것은 부모와 관계하는 것이 좋고 편해서가 아니다. 아이를 성장하게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지 살피고, 그것이 부모라면 직접 만나 이 문제에 관해 의논했다. 아이가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고 느끼면 꼭 부모에게 알렸다. 만나기 꺼리는 부모는 밤늦게 직장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그들이 아이의 곁에 함께 있어주길 바랐다. 아이의 변화는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교사와 부모가 함께 손잡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렇게 관계를 맺었고, 설득했고,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었다. 그 신뢰 위에서 아이는 바뀌었고, 나 역시 교사로서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나는 학년 초에 부모에게 한 번 전화를 건다. 교사와 학부모의 역할은 다르다는 점, 학교에서 해줄 수 있는 일과 가정에서 해주어야 할 일을 간단히 안내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는다. 알림장은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매일 칠판에 ‘오늘의 일정’을 적는다. 아이들과 직접 소통한다.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반복해서 확인시켜주고, 중요한 내용은 아이가 직접 전달하게 한다. 아이를 중심에 두는 방식이다.
이제 나는 학부모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와 하루를 살아내는 데 집중한다. 말을 아끼게 된 것은 교사가 말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말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걸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말이 왜곡되어 돌아왔고, 때로는 상처만 남았다. 나는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결국 변한 사람이다. 그 사실이 가장 서글프다.가장 극단적인 상황은 학교폭력 신고를 언급하는 순간이다. 예전에는 당황하고 마음이 무너졌지만, 지금은 단호하게 말한다.
“신고하십시오. 다만 그 순간부터 이 일은 교육이 아닌 법의 영역입니다. 담임교사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조정 요청도 받지 않습니다.” 이 말은 차가워 보일지 모르지만, 교사가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방어선이다. 법은 교육과 다르다. 배려는 없고, 관계도 없으며, 미래도 고려되지 않는다. 오직 판단과 책임만이 존재한다. 한때 나는 물었다. “앞으로 자녀가 더 큰 문제를 만나면, 그때는 무엇으로 해결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질문조차 꺼내지 않는다. 내가 지쳐 있기 때문이다. 학부모와의 관계는 분명 달라졌다. 그리고 나도 변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으려 버텼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젠 설득하지 않는다. 분노를 품은 누군가와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혼란스럽고 상처받은 아이들과 하루를 버텨낸다. 그 아이들이 내 곁에서 웃어주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 미세한 웃음 속에서, 나는 아직 교사라는 이름을 붙잡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누가 교육부 장관이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 교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할 때 교육은 망한다. 그리고 정권도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