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언 화업 50년이 다 되어 돌아보니 감개무량할 뿐이다. 그림을 배우고자 처음 화실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1976년 말이었다. 회화의 기초를 조금 알만할 때 대학에 입학하여 오랫동안 입시미술을 준비한 동료들과 경쟁해야 했던 대학 1년은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었다. 그러나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2학년 때 나는 친구 이동구와 함께 한국화(동양화)를 선택했다. 우리는 한국화 전공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후 ‘대통령 시해 사건’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맞아 1980년 돌연 두 명의 친구, 이동구, 이기방과 함께 휴학하고 입대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1981년 여름 ‘야투’의 창립에 참여하여 ‘자연미술’에 심취하게 되었다.
최근 나의 작업은 주변에 흩어진 자연 오브제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동안 작업실에서 때를 기다려온 것부터 산책길에서 만난 것 또는 이웃 마을 등 주변을 오가며 눈에 꽂힌 것을 가져와 각각의 오브제가 지닌 결대로 깎고 다듬어 예술성을 부여한다. 대부분 나의 오브제는 논두렁, 밭두렁, 또는 도로변 냇가 등지에 버려진 나무토막이다. 나는 그들의 사연을 작업의 주제로 활용함으로써 죽은 나무토막을 부활시키고 그들과 대화를 통해 내 작업의 내용이 전보다 윤택해짐을 즐기고 있다.
예술가의 일반적 창작은 작품의 구상과 계획에 따라 재료를 구하여 계획한 내용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작업은 재료(오브제)를 만나야 비로소 작업이 시작된다. 대부분 대상이 이미 어떤 상태에 있거나 나의 지각으로 느껴지는 것을 주제로 작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 속 '자연미술'의 경험으로 얻어진 방법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작업을 '비조각 입체'라고 말한다. 일련의 작업에서 나는 자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통역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비조각 입체를 특별히 조각과 구분하는 것은 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 조각의 영역에서 재료는 재료일 뿐 어떤 작용도 하지 아니한다. 오직 작가의 예술적 의지로 재료를 준비하고 그것을 작가 고유의 방식대로 다루는 과정에서 창작이 이루어진다. 반면 나의 작업은 대상(오브제)과 나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나에게 대상이 지닌 모든 것은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오브제가 지닌 정보는 일종의 메시지로써 작품의 뼈대이며 작품의 서사적 내용이 된다. 결국 작업 과정은 오브제의 특성을 객관화하는 과정이다.
* 야투(野投) : ‘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의 약칭. 1981년 창립 이후 자연 현장의 미술 연구 끝에 ‘자연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방법론을 개진해 왔으며, 국제자연미술전 또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통해 한국의 자연미술운동을 전 세계로 확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