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읽고 있던 책을 덮어두고 잠시 다른 책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아닐까? 특히 남미는 장르가 완전히 다른 책처럼 뚜렷하게 구별되는 환경과 색다른 문화가 존재하는 곳으로 지구별의 다른 곳에선 쉽게 접하지 못하는 지역이다. 그런 이유로 잉카제국의 심장인 쿠스코는 세계인들이 오고 싶어 버킷리스트에 올리는 매력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남미여행이라 할 수 있는 안데스 산자락인 해발고도 3400m인 쿠스코에 도착했다. 쿠스코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잉카시대 ‘전사의 광장’이라 불렸던 아르마스 광장은 해발고도만큼 낮게 내려앉은 푸른 하늘과 고풍스러운 성당, 예수회 교회 등이 어우러진 풍경으로 여행객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광장 주변의 상가들은 아치형의 지붕이 덮여있는 회랑으로 되어 있어 비가 오는 날에도 시내를 돌아다니기 좋은 도시다. 광장은 잔디 깎기가 한창이었다.
의자에 앉아 쿠스코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있을 때 쿠스코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멕시코에서 오셨다는 아주머니와 나 사이에 앉았다. 언제부턴가 여행지에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면 나만의 방식으로 소통을 즐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나라말로 할아버지가 하시고 싶은 얘기를 하고, 멕시코 아주머니는 멕시코 말과 영어를 섞으며 대화를 하고, 나는 우리말과 영어 단어를 섞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대화 사이에서 아는 단어 한마디가 들리면 유추 해석하며 소통 아닌 소통을 하는 것이다. 쿠스코 할아버지와 멕시코에서 오신 아주머니와 나는 서로 다른 얘기를 서로 다르게 소통하며 즐겁게 웃었다. 우린 쿠스코 광장의 한 의자에 함께 앉은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고산증이 심해지자 쿠스코의 일정을 다음으로 미루고 서둘러 우루밤바로 떠났었다. 그곳에서 2박을 하면서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에 오르고 안데스 산맥의 보물 살리네라스 염전의 원천인 염수가 흘러나오는 웅덩이에서 염수를 맛보고, 식량 종자 개발을 위해 실험 경작지로 만들어진 모라이에서 잉카인들의 지혜를 보았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구불거리는 능선을 넘어 잉카제국의 심장 쿠스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잉카의 성터인 삭사이와망에 들렸다.
삭사이와망은 높이가 9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350톤을 넘는 바위들이 석벽을 이루고 있었다. 고대 잉카인들은 하늘은 콘도르,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민족이다.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핵심 가치인 힘, 지혜, 지능을 상징하는 퓨마 형태를 닮은 도시다. 그래서 잉카인들은 쿠스코를 퓨마의 몸통으로 생각하고 퓨마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인 삭사이와망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삭사이와망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만들어진 의도와 무관하게 현재는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알파카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 김양숙, 1990년『문학과 의식』시 등단, 2009년 [한국시인상] 수상, 2017년 [시와산문 작품상] 수상, 2013년 부천문화예술발전기금수혜. 2024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비 수혜, 시집『지금은 뼈를 세는 중이다』,『기둥서방 길들이기』,『흉터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고래, 겹의 사생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