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존중의 마음을 나는 가져보았는가 -김황흠 「차마 돌아섰다」
차마 돌아섰다
김황흠
제방 가 전봇대 지지선을
오늘도 하루가 멀다 하고 더듬어 오르더니
지지선을 둘둘 말아 간다
여러 줄기가 뭉친 푸른 팔뚝
힘줄 하나는 참 오져서
한여름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비비 꼬고 올라가며
꿀 같은 시간이라고
연보라 꽃을 피웠다
연일 풀 베느라 잔뜩 독 오른 나는
한 번 낫으로 쳐 버리면
끝날 힘줄을 향해
한마디 툭 내뱉고 돌아섰다
비워 두어야 할 곳이 있는 것이야!
-김황흠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문학들)에서
시골길을 가다 보면 전봇대 지지선을 타고 올라가는 칡덩굴을 자주 봅니다.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숨통이 터져선지 그 큰 잎이 정말 무성합니다. “여러 줄기가 뭉친 푸른 팔뚝/ 힘줄 하나는 참 오져서/ 한여름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만 베어내도 주변이 다 환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연일 풀 베느라 잔뜩 독 오른” 화자인데도 베지 못합니다. 왜 베지 못한 것입니까? “끈질기게 비비 꼬고 올라가며/ 꿀 같은 시간이라고/ 연보라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꽃이 예쁘니 어쩌니가 아니라 이 땡볕 속에 그냥 “꽃을 피웠다”는 사실과 마주한 것이고 그 사실을 존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차마 돌아섰다”고 말합니다. 이해(利害)에 따른 처분이 가능하지만 그 사실 앞에서 멈춘 것입니다. 이런 존중을 생명적 질서에 대한 예의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칡덩굴에게 한마디 합니다. “비워 두어야 할 곳이 있는 것이야!” 그런데 이 말도 참 묘한 울림을 줍니다. 왜냐하면 말은 윤리적인데 칡덩굴이 윤리적일 까닭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칡덩굴에게 한 말이라기보다 이해에만 매달린 인간에게 반성적 태도를 주문하는 말이 됩니다. 생명적 질서에 대한 예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나 중심의 이해를 비우라는 의미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