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작업
일 년의 기다림 끝에 돌아온 겨울 현장 작업은 모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백사장을 거닐며 작업하는 상상만 해도 설레는 마음에 연구회 당일을 기다리는 기간이 더 길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거사를 하루 앞두고 추위가 누그러져 비 오는 겨울의 현장이 되었다.
모두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상상의 날개를 접고 주어진 현장의 조건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뜻밖의 겨울 속 가을 같은 날씨는 젊은 작가들을 당황하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임기응변의 기지와 유연한 사고의 전환을 부추겼다.
찬비를 맞으며 작가들은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어부집 뒷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기슭에서 백사장까지 네모난 흰 종이를 꽂아 역삼각형을 그리는가 하면 호미로 백사장에 커다란 호미를 그리는 등 비교적 규모가 큰 작업(고승현)과 다른 한 편에서는 서적을 불태우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명명된 개념성이 강한 작업(정장직)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빳빳한 종이 위에 모래를 입혀 강건너 산을 똑같이 백사장에 재현(허강) 하거나, 커다란 화살표를 백사장에 음각으로 표현(이동구)하는 등 단순화된 이미지가 내포한 확장된 의식의 작업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눈을 연상한 계획들이 쓸모가 없게 되어 강변을 배회하다 발견한 백사장의 부유물들을 청소하는 기분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으로 수집한 오브제들을 물가에 세워놓고 나 자신도 그들과 함께 서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사진을 찍었다. 쓰고 버린 물건 또는 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 그런 사람들의 의식도 쓰레기와 같다는 것이 작업의 컨셉이었다.
허강, 무제,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