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은퇴한 이후 삶의 방법에 대략 암묵적 합의를 하고 있었다. 살아갈 몇 곳도 정해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집을 짓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것도 파주에... 그것은 정말 급격한 선회였다. 급격하다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 식현리에서 함께 농사를 짓던 모임의 사람들이 작년에 눌노리에 큰 땅을 사서 그것을 16필지로 나누어 이미 거주할 사람들이 확정된 곳이다. 그런데 그 중 한 필지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독일인 남편의 사정에 의해 귀국이 불분명해진 것이다. 그곳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었다. 뛰어들었다. 불나방처럼... 그러나 내겐 나름대로 분명한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집 짓기로 결정한 우리에게 한 말은 참으로 다양하다. 왜 파주냐에서부터 땅값이 평당 얼마냐, 러·우 전쟁으로 자재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이때 하필?. 그중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집 짓는데 평당 얼마냐?’였다. 속칭 ‘허가방’이라는 건축사무소에서 도면 몇 장 받아 허가받고 집장사에게 맡겨 공사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여전히 우리 사회 집짓기 방식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 주변에 집을 지어 본 사람이 몇 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중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과 자주 대화가 오갔다. 그는 3층짜리 복합건물을 올리고 자신이 거주할 공간을 3층에 두었다. 그의 오빠가 건축과 관련한 일을 했는지 암튼 오빠의 권유로 시작한 일이었다고 한다. 왜냐면 부부 둘이 아직도 현직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건물을 짓고 있을 때 나는 현장에도 같이 가 보았고 때로 여러 번 만나서 이야기도 들었다. 건축의 1도 모르고, 집 지을 생각이 전혀 없던 몇 년 전의 나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지만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이 있다. 만날 때마다 그는 현장의 답답함에 화를 내기도 하고, 도면이 잘못되어 자신들이 몇 밤을 새워 스스로 도면을 고쳤다는 이야기 등이다. 그러면서 주변에 건물을 올리는 소위 집장사들의 이야기도 곁들였다. 그들과 친숙해진 모양이다. 집장사들이 건물을 올리고 분양하든지 세를 주든지 하는 기간이 약 1년이 걸린다고 했다. 그 집장사들의 이익을 연봉으로 치면 최소 1억 이상이라고 하는 사실까지 확인했고 내게 전했다. 건물을 지어 보니(실제 그는 두 개의 복합건물을 지었다) 이제 건물 짓는 방법을 터득한 양 퇴직하면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며 심지어 퇴직한 내게 슬쩍 권유하기도 했다. 연봉 1억이라니, 그것도 최소... 내가 퇴직한 해(30년 가까이 복무) 나의 연봉은 1억에 많이 못 미치는 액수였다.
내 딸은 성미산 마을에 산다. 소위 ‘소행주’(소통이 있어서 행복한 주택)로 불린다. 여섯 가구가 공동으로 땅을 구입하고 5층으로 올린 건물에 각 모양새도 다르고 평수도 다른 공간에 여섯 가구가 산다. 마치 그 건물 안은 작은 마을처럼 각 집을 아이들에게 오픈하기도 하고 사생활을 보호하는 룰도 만들면서 의지하고 때론 독립채처럼 옹기종기 살고 있다. 딸 내외가 그 작업을 시작했을 몇 년 전 당시의 나 역시 여전히 건축의 1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맞벌이 부부로 어린 자식을 돌보며 시작한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직장 일하랴, 공동주택 짓기에 시간을 내랴 밤낮없이, 경황없이 지내던 모습만 기억한다. 집 짓기를 시작한 내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딸 내외는 엄청난 일을 해 온 것이다.
앞에서 말한 후배는 우리의 집 짓기에 관심을 두고 여러 가지 조언과 질문을 했는데 우리는 손바닥만 한 집이지만 건축가에게 설계와 감리를 맡겼다고 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언니,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사위도 같은 말을 했다. “어머님, 아버님, 그게 맞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