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바다에서 길을 묻다/ 홍유경

무수한 생명들의 역동을 목격할 수 있는 바다에서, 나는 평소의 나보다 조금 더 돌발적이며 조금 더 창조적인 사람이 되곤 한다.

하무뭇 승인 2022.06.09 11:43 의견 0

우리가 지각생인 계절의 맛을 찾으러 간 곳은 충청도 홍성 남당항이다. 이 계절엔 새조개를 먹어야 한다는 미식가 친구를 믿어 보기로 했다. 친구가 숨겨논 궁극의 맛집이라는 남당항 꽃동산 횟집.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마당의 해송이 인상적인 집이다. 해송은 이 곳에 뿌리를 내린 이래, 아마도 매일같이 부딪혀야 하는 바닷바람과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웠으리라. 먼저 힘을 빼고 바람의 방향과 강약을 몸에 새겨 넣었으리라. 몸을 45도로 굽혀 예를 다하면, 바람도 예를 갖추어 나무를 꺾지 않고 에둘러 간다는 것을 배웠으리라. 거스르지 않는 것이 극복하는 것이다. 해송이 나에게 말없는 말을 건넨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낯선 풍경들이 나를 환대하는 법은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그들이 말하는 법은 우회적이지만 감각적이어서 해석이나 번역이 필요없다. 그저 나의 오관으로 스며드는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을 느끼면 그 뿐. 직설적이지만 나의 감각을 소외시키고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소리들, 이를테면 지금 미디어가 쏟아내는 이 세계의 흉흉한 소식 (그것들은 주로 확진자수 얼마, 치명률 얼마 이런 식의 숫자로 표현된다) 같은 것과는 아주 다르다. 하나는 조곤조곤 말을 걸고, 다른 하나는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놓는다. 자연과 미디어는 전혀 다른 문법을 사용한다.

횟집 주인 아줌마가 새조개 샤브 상차림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횟집 앞 바닷가에 수북하게 쌓인 새조개껍질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모양새의 껍질 바깥면에 비해 조개의 안쪽면은 선혈이 대리석에 번져나간 듯 원초적인 그라데이션 문양으로 펼쳐진 핑크빛 부채살에서 야릇한 아름다움과 생명감이 배어 나온다. 예전에 나는 해산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리고 물컹한 식감이 내 비위에는 잘 맞지 않았다. 고향이 바닷가라 해산물을 좋아하는 몇몇 친구 덕분에 덩달아 해산물 요리를 먹다가 차차 그 맛을 알아가게 되었는데, 지금도 조개류는 별로지만 회는 없어서 못 먹는다. 사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먹는 일 자체에 별 취미가 없는 그런 부류다. 좋게 말해 식탐과 무관하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미각에 있어 둔치라고나 할까 ( 요리도 X손이다). 누군가와 식사약속이 있어 뭐 먹으러 갈래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살짝 난감해지곤 한다. 딱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나에게 식사메뉴 선택권은 의미없는 것이기에 대체적으로 상대에게 그 권리를 양보하곤 한다.

바다는 속을 알 수 없는 것, 끝을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우리는 바다에서 온 것들로부터 바다의 성품을 추측할 수 있다. 아이를 낳고 온 몸의 뼈가 한 번 떴다 다시 제 자리를 찾는 동안 미역은 산모의 기진한 몸 안에 들어가 푸른 점액질을 녹여내 피를 만들고 뼈를 붙여주며 다독이는 치유의 약초이다. 멸치의 면모는 또 어떠한가. 해방 후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멸치는 푸성귀나 말린 채소를 넣어 끓인 된장국에 자신의 살과 뼈를 풀어 어떤 재료라도 어우러지게끔 포용하는 바다의 넉넉한 선물이었다. 미나리, 봄동, 숙주, 청경채 등 야채를 넣은 육수가 보글보글 끓는 동안 친구는 새조개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이것봐 정말 새처럼 생겼지 하며 히히 웃었다. 나는 홍학의 머리같네 일명 새대가리 조개구먼 하고 마주 보며 낄낄 웃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새조개였다.

바다는 육지의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동시에 격리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는 별리(別離)의 아이콘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미움을 산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인과 만나기까지 숱한 난관을 겪으며 바닷길을 떠돌아야 했고, 연오랑은 바닷가에서 해초를 따다가 물고기 (혹은 바위)에게 납치되어 바다 건너 일본까지 가게되어 세오녀와 생이별을 한다. 익숙한 고향를 떠나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를, 알껍데기를 벗고 한 차원 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요구하는 존재가 바로 바다이다. 바다는 소멸하는 무덤이자 탄생의 자궁이다. 바다는 지구의 생명체가 맨 처음 시작된 곳이다. 그래서일까? 바다에서 헤엄치던 것들은 포식자의 혀에 저항하는 원초적 식감을 가지고 있다.

바닷가나 섬에서 가끔 운이 좋으면 어부가 금방 잡아온 횟감을 만날 때도 있다. 뜰채로 물고기를 떠올리는 횟집 사장님 팔뚝 정맥이 불끈 솟아오르도록 힘이 좋은 놈들은 마치 날아오르기라도 할 듯 힘차게 수조나 어망을 차고 뛰어오른다. 그 펄떡이는 약동을 보노라면 저 씽씽하게 살아있는 것을 미안해서 어찌 잡을 것인가 양심의 가책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일단 그것이 접시에 올라와 식품으로 변환되고나면, 그 탱탱하고 쫄깃한 맛은 도시의 어느 최고급 횟집이라 할지라도 견줄 수 없는, 하늘과 땅 차이의 풍미를 느끼게 하는 건 또 어쩔 수가 없다. 지인 중 한 사람은 돌아오는 안식년에 섬에 들어가 집과 고깃배를 빌려 물고기를 잡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십이 넘도록 학교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 외에 딱이 내노라하게 즐기는 것이 없어 보였던 그의 어느 구석에, 저토록 자연으로 돌아가 날것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었는지 놀라웠다.

강화도에 집을 짓고 어부가 되겠노라는 당신의 말에 그럼 나는 분오어판장에 횟집이나 차려볼란다며 사실 바다의 진정한 매력은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날것에 있다. 그는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천방지축이며 대책없는 바람둥이거나 비난할 수 없는 에로스의 열정이다. 그것은 두렵고 위험한데도 빠져들 수 밖에 없다는 면에서 사랑의 속성을 닮았다. 아름다움과 사랑을 주관하는 여신 아프로디테가 바다 거품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콜롬비아대학교 심리학과 도날드 듀튼 교수와 아더 아론 교수가 발표한 '불안감이 심할 때 이성에게 느끼는 매력이 높아지는 증거' 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다. 실험 참가자들을 둘로 나눈 후, A 집단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다리' 를 건너가게 하고, B 집단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다리'를 건너게 했다. 이 때 다리의 끝에서 여자 조교가 대기하고 있다가,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번호를 주면서 실험에 관해 문의사항 있으면 전화하라고 말한다. 과연 어느 다리를 건넌 참가자들이 여자 조교에게 전화를 많이 했을까? 결과는 B 집단이 A 집단보다 4.5배나 많이 전화를 했다고 한다. 흔들리는 다리를 건넌 참가자들이 두려움때문에 심장이 뛰는 현상을 여자 조교에게 이성적으로 끌렸기 때문이라고 뇌가 '착각' 함으로써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 실험은 생리적 반응 자체가 우리 판단이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편안하지만 정체되기 쉬운 일상의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자고자, 매번 사랑에 빠질 수야 없지 않은가.(능력이 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겠다만) 여행은 값비싼 사랑에 비해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대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심장이 뛰고 동공이 커지는 생리 현상과 설레임을 가져다 주는데 특히 바다 여행은 더욱 그러하다. 바다는 바람과 햇빛과 달이 자신의 동선과 속마음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대상이다. 무수한 생명들의 역동을 목격할 수 있는 바다에서, 나는 평소의 나보다 조금 더 돌발적이며 조금 더 창조적인 사람이 되곤 한다.

섬은 바다라는 물리적 단절감으로부터 생성되는 막막함과 해방감이 묘하게 교차되는 드라마틱한 장소이다. 나올 때 쯤 폭풍우가 와서 교통편이 결항되면 좋겠다 ㅡ 나는 가끔씩 섬으로 들어가는 배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이런 불순하고 달콤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자주는 아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러니까 순전히 나쁜 기상 상태에 책임을 옴팡 뒤집어 씌우고,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채 섬에서 한 사나흘 덤으로 얻은 유배 휴가를 즐겨보는 것. 소심한 일탈의 로망이다.

실제로 섬은 예전에 유형지이기도 하다. 위험한 인물을 가두고 바다로 꽁꽁 두른 후 오도가도 못하게 격리하는 천연의 요새 감옥인 셈이었다. 하긴 일 년 반이 훌쩍 넘어가도록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팬데믹 상황은 세상의 온갖 제한과 구속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으니 우리도 일종의 감옥을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흑산도에서, 추사의 세한도는 제주도에서 결실을 맺은 걸출한 유배 문학인데, 그렇다면 혹시 모를 일이다. 지금 어디에선가 인류 지성사의 빙하를 깨고 인간의 인식을 진일보시킬 쇄빙선같은 걸작이 익어가고 있을지.

봄맞이는 서해 남당항에서, 여름은 제주에서 너와 함께 마중하기로 한다. 여행 일정이 하필 장마와 겹쳐 버렸으나, 그렇다고 어렵사리 맞춘 여행 일정을 망설일 수는 없다. 제주에서 여름비에 싱싱하게 젖은 채, 바다로 난 올레길을 걷는 것은 그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바다를 향해 겁없이 몸을 던져 추락하는 정방폭포 물줄기의 장렬함을 감히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 단 0.1초의 망설임조차 없는 그 명쾌한 속도감, 빗줄기와 물거품이 더불어 빚어낸 자욱한 물안개, 정령이 깃들어 있는 듯 바다의 풍경은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다. 월령포구에서 한림항으로 향하는 올레 14코스는 섬의 섬 비양도를 보면서 걷는 해안길이다. 풍차가 보이는 하얀 등대 위에서 네가 좋아한다는 락음악을 틀어놓고 함께 춤을 추었지. 네 동작을 따라하다 아, 이럴 땐 막춤이 최고야. 춤은 미친 듯이 추는게 최고다. 해드뱅잉도 넣어가면서. 백댄서 파도, 코러스 갈매기와 어루러지는 월령포구 페스티벌. 비가 개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럽게, 말끔한 하늘과 금능해변의 파란 비경이 펼쳐진다.

(홍유경/ K병원 약사, 시인)

남당항 새조개 패총

바다에서 너와 함께 여름을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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