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눌노리에는 ‘빈센트(Vincent)’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파주는 콩 생산지로, 예부터 두부를 만드는 곳이 많았고 그 전통을 이어 지금도 두부 음식으로 이름난 맛집들이 여럿 있다. 이 카페도 과거에는 두부 공장이었다. 문을 닫은 채 거의 무너져 가던 건물을 카페로 바꾼 사람은 외지에서 살던 아들 부부였다. 그렇게 카페를 만들고 카페지기로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십 년쯤 되었다고 한다. 키가 작은 나무와 자연스럽게 자란 풀과 꽃들이 있는 안마당을 지나 실내로 들어서면, 벽에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들이 수십 점 걸려 있다. 드립커피를 마시다 보면 돈 맥클린(Don McLean)이 빈센트 반 고흐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썼다고 말한 노래, ‘빈센트(Vincent)’가 잔잔히 흐른다.
집을 짓고 눌노리 주민이 되면서 이런저런 경로로 카페지기가 목사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목사님과 짧은 대화 중에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의 이름이 나왔다. 이사할 때마다 많은 책을 정리했지만, 나우웬의 책만은 한 권도 떠나보내지 않았다. 빈센트와 나우웬은 같은 네덜란드인이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두 사람을 연결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빈센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카페의 이름 ‘빈센트’가 나우웬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대화는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목사님은 신대원 시절, 빈센트 반 고흐의 영성에 대해 발표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출발점이 나우웬이 쓴 ‘빈센트 반 고흐의 소명’이라는 소논문이었다고 한다. 카톨릭 사제였고 하버드와 예일대에서 가르치던 엘리트 교수였던 나우웬은 훗날 라르쉬 공동체에서 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다. 나우웬이 말하는 빈센트의 소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소명(召命)이란 ‘신이 부르는 명령으로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 어떤 요구나 필요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빈센트가 회피할 수 없었던 소명은 무엇이었을까. 무심히 지나쳤던 카페 안의 그림들을 유심히 보며 질문들은 밀물처럼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카톨릭 신자가 다수였던 네덜란드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던 개혁 교회의 목사였다. 신자들이 겪는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위로의 눈길을 전하는 설교자였다. 빈센트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목회자와 선교사의 길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 세상과 잘 화합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이해받는 것이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아버지와 불화하며 이해를 받지 못한 채 자랐다. 아버지는 빈센트의 남동생이 태어나자 자신과 같은 ‘테오’라 이름 짓고, 그 아들에게 기대와 사랑을 쏟았다. 빈센트는 아버지 테오에게서 받지 못했던 이해를,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동생 테오에게서 평생 받으며 살았다. 동생 테오는 형이 죽을 때 곁에 있었고, 형의 작품과 명성을 지키고 알리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그는 형의 죽음을 따라가기라도 하듯 형이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과로와 병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형과 아우, 빈센트와 테오의 삶과 죽음은 너무도 가까이 맞닿아 있다. 같은 이름의 두 테오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빈센트 곁에 있었던 이 가족 서사는 내게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반 고흐의 가(家)에는 빈센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셋 있다.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와 어머니 안나 사이에 태어난 첫아들은 사산아였고 그의 이름은 빈센트였다. 묘지까지 마련된 이 아이가 첫 번째 빈센트다. 1년 뒤, 같은 날 태어난 두 번째 아들에게 부모는 다시 빈센트라는 이름을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이며 두 번째 빈센트다. 세 번째 빈센트는 동생 테오의 첫아들이다. 테오는 아기가 태어나자 형에게 편지를 써, 아기의 이름을 ‘빈센트 빌렘 반 고흐’로 지었다고 알린다. 형의 죽음을 불과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빈센트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뒤 테오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아기 빈센트는 돌이 되기 전이었다. 테오가 죽은 후 그의 아내 요한나는 빈센트의 방대한 그림과 편지 등을 정리하고 전시를 기획한다. 남편 테오가 평생 지지하고 이해했던 형의 예술을 지켜 내는 일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자 그의 신념을 이어가는 일이었다. 아들 빈센트는 화가의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따라 삼촌 빈센트의 작품 보존과 연구에 헌신했다. 삼촌의 작품을 한 점도 팔지 않고 오히려 흩어지지 않게 붙잡아 세상과 연결했다. 마침내 반 고흐 미술관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삼촌의 이름을 인류의 기억 속에 남겼다. 첫 번째 빈센트는 태어나지 못한 삶이었고 두 번째 빈센트는 살았으나 너무 아프게 사라진 삶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빈센트는 ‘박물관’이라는 형태의 생존으로 삼촌 빈센트를 다시 살려냈다. 네덜란드에서는 가족에게 같은 이름을 주어 가계와 전통을 잇기도 했다지만, 나는 빈센트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세 사람의 가족 서사가 단순한 전통의 계승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요양원에서 예고 없이 엄습해 오는 발작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빈센트는 그리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발작의 고통이 너무 심해 스스로 물감을 삼키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는 마치 회피할 수 없는 소명을 자각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그렸다. 공포와 불안의 한복판에서, 그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별이 빛나는 밤’을 남겼다. 그런 상황 속에서 쓴 편지라고는 믿기 어려운 문장이 있다. “인생을 되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가라는 사실이야. 가능한 많은 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 그 안에 삶의 진정한 힘이 있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력이 있는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어.” 돈 맥클린은 이 편지를 읽고 노래를 썼을까?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나우웬은 빈센트의 소명을 ‘긍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85세 된 조카 빈센트와 만나 나눈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한다. “삼촌의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생전에 어울리기 힘든 불쾌한 사람, 친구도 없고, 심지어 두려운 사람으로 더 유명해진 분이었습니다...(중략) 그러나 삼촌은 사람들의 피부 밑으로 기어들 수 있었습니다. 삼촌도 평범한 보통 사람인데, 사람들의 영혼 한복판에서 무언가 그릴 가치가 있는 아름답고 고귀한 존엄성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삼촌의 그림을 보러 왔을 때 이런 말들을 합니다. ‘빈센트야말로 진정 이해해 주는 분이었구나’ 그리고 사람들은 위로를 느낍니다.” 그가 실제로 탄광지에서 전도자로 살며 가난한 광부들 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것처럼, 화가가 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영혼 한복판에 있었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는, 그 긍휼의 시선을 나우웬은 빈센트의 그림 속에서 보았던 것이 아닐까? 책 몇 권 읽은 것으로 그의 삶과 그림 등을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복해서 인용한 성경 구절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 6:10)” 여기서 근심은 걱정보다 ‘슬퍼하는 자(sorrowful)’에 가깝다. 빈센트에게 슬픔은 기쁨의 반대가 아니라 동전의 다른 면이었다. 분노의 이면에는 상처가 있었고, 그의 고독은 언제나 긍휼과 함께 있었다.
작년부터 나는 일주일에 하루를 ‘부엌 닫는 날’로 정하고, 오후 시간을 빈센트에서 보낸다. 테오의 집에는 팔리지 않는 빈센트의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고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테오는 형의 편지를 읽고 형에게 편지를 썼다. 빈센트는 끝까지 그렸고 테오는 끝까지 그의 소명을 믿었다.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했던 빈센트의 그림들, 그림이 걸리고 비어있는 벽면의 공간에는 테오의 다함 없는 이해와 사랑이 있다. 의자에도 테이블에도 카페지기 부부의 드립커피와 단호박 쌀빵에도 있다. 빈센트에 가면, 테오를 만날 수 있다.(얼치기 농부 김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