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인들에게 가장 대표적인 체코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나 이 사람이라고 대답한다는 차렐 차페크. 그의 수많은 저서 중 《정원가의 열두 달》은 1929년 처음 출판되어 100년 가까이 된 지금도 여전히 오늘의 책으로 읽히고 있다. 차렐 차페크와 많은 정원 일을 함께 했던 형 요제프 차페크가 글 사이사이에 그린 삽화는 따뜻한 미소를 만드는 제조기다. 차렐 차페크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간결한 언어로 섬세하게 묘사한다. 읽는 내내 유려하면서도 위트 있는 문장에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동시에 폐부를 찌른다. 시작은 이렇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마치 가드닝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아마추어 정원사란 꽃을 만들고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만들고 즐기는 사람"이라며 지구는 전일적 생명체임을 성찰하게 한다.
그는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봄은 발아의 계절이고, 가을은 진정한 발아의 계절이다. 11월의 한계선 안에서 3월의 생명은 싹을 틔우고 11월의 땅, 그 속에서 다음 봄을 위한 설계도가 이미 완성된다"고 썼다. 11월에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땅은 비어 가는데 진정한 발아의 계절이라니······. 텅 비었는데 가득 찼다는 역설이다. 내 눈에는 모두 곧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11월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아라파호족도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니 곱씹지 않을 수 없는 역설이다.
‘누가 설계를 한다는 것일까’부터 ‘땅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까지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생각들에 겹겹이 싸여간다. ‘설계’라는 단어에 문득 집을 짓기 전, 「지음아키씬 건축사사무소」에서 부부 건축사와 미팅을 가졌던 때가 떠올랐다. 열네 가구가 들어 설 부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디가 우리 집을 지을 곳인지 구분도 잘되지 않던 그때 마을의 마스터 플래너인 건축사는 물과 불의 공간, 집과 몸이 자연과 섞이는 공간, 바람길, 지역 지형과 산세 등 자신의 머릿속에 가득 찬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개념이 잘 서 있지 않은 내용이라 이해도 더딘데, 우리에게는 우리의 가치와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공간을 만들어 내야하는 낯선 상황에 직면했다. 한국인의 60%는 아파트에 살고 있고 나도 그 중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껏 만들어진 집에 내 몸과 생활을 맞추며 살았으니 내게 맞춤한 공간을 생각하는 일은 매우 낯선 과제였다. 마치 '11월' 같은 빈 터에 건축사의 머릿속 수많은 생각들이 설계로 형상화되고, 우리가 살 공간에 대해 건축주와 건축사가 무수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공간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집이 지어졌다.
11월의 자연 공간도 그런 것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그 ‘무엇’이 설계를 하고, 나는 필요에 따라 맞춤한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무엇’을 ‘섭리’라는 눈으로 보고 있지만 타종교에서는 연기(緣起), 무위자연(無爲自然) 등으로 말한다. 집을 지으면서 집짓기는 건축사와 건축주가 함께 하는 공동작업(collaboration) 임을 배웠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도 섭리 속에서 사람과 함께하는 또 하나의 공동작업과 다르지 않음을 생각해 본다. 그 섭리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농부임을 손바닥 만한 텃밭을 가꾸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주는 宇(집우) 宙(집주)라고 쓰여지지 않았을까?
귀촌하면서 11월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지난여름 채종한 꽃씨를 내년 봄에 뿌리려던 계획을 바꿨다. 그들이 어디쯤에 있으면 좋을지 공간을 찾았다. 그곳에 여름이 스러지며 남긴 상처들을 매만져 주고 씨를 묻었다. 얼지 않도록 마른풀과 잔가지 등도 잘라 덮어 주었다. 비록 내가 들여다 볼 수 없는 땅속일지라도 섭리에 따라 봄이 완성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봄에 내가 그들을 만나면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네가 꽃이 되기 전에 나는 이미 너를 알고 있었다”라고······. 남편이 심자고 했던 토종알뿌리 수선화도 샀다. 하얀색과 노란색, 그리고 금잔옥대다. 금잔옥대는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가 반했다는 수선화다. 제주를 제외한 육지에서 노지 월동이 어렵다는데 희망을 담아 심었다. 겨울 내내 꽃 피울 에너지를 알뿌리에 응축하고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면 수선화는 폭발적으로 꽃을 피울 테지. 사람이 줄 수 있는 희망이 아니기에 나는 설렌다.
작은 땅에 작은 집을 지어 정원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나무들을 심었다. 3년쯤 지나니 제법 자리를 잡아 꽃이 피고 단풍이 든다. 그러나 북쪽 현관 쪽에 심은 능소화와 아직 나이가 어린 모과나무, 별목련에게는 잠복소를 입혀 월동을 도와야 한다. 뿌리가 얼지 않도록 덮어주고 가지치기도 하며 옷을 입혀 준다. 눈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다. 밖에서 이러한 갈무리를 하다 보니 유독 눈길이 닿는 장소가 있다. 작물을 심기에는 적절치 않아 비어있는 공간이다. 빈터를 만들면 자연이 뛰어들어 무섭게 일하기 시작한다더니 그곳은 매년 공격적으로 자라는 풀을 잡기에 힘만 드는 공간이다. 밭을 만들 때 캐낸 돌무더기가 눈에 들어온다. 돌담을 쌓아 조금 높은 화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날마다 조금씩 돌들을 옮기며 쌓아 작은 화단을 만들어 간다. 밖에서 이런저런 분주함으로 이웃이 준 수세미 두 개가 툇마루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남편이 삶고 껍질을 벗겨 부엌 창틀에 세워 놓았다. 멋지다!(글 얼치기 농부 김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