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계곡


늦가을 제주에 가면 한라산 중턱에 억새가 은빛으로 출렁이는 산굼부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산굼부리는 마르형 화구다. 마르형 화구란 일반적인 화산의 분화구와 달리 용암이나 화산재가 분출 없이 깊은 지하의 가스 또는 증기가 지각의 틈을 따라 지하로 폭발하여 생성된 그러니까 움푹 파인 분화구를 말한다. 여기서 엉뚱하게 산굼부리 얘기를 꺼내는 것은 라파즈라는 도시가 제주도의 산굼부리의 형태를 닮았기 때문이다. 라파즈는 원래 추키아고(Chuquiago)라고 불리는 인디언 거주지였다. 해발고도 3,600m의 움푹 파인 부분에 도시의 중심가가 형성되어 있으며 절구 모양의 가장자리인 고도 4100m까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서 ‘구름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해발고도 4070m 분지에 만들어져 있는 공항에 새벽 04시 30분 도착했다. 불빛이 졸고 있는 어두컴컴한 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중 나온 버스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로 가는 동안에도 어두운 길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처음 라파즈에 도착했을 때는 주위가 어두워서 풍경을 볼 수 없었으며 도시가 절구 모양인 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불확실 속을 달리던 젊은 날처럼 계속 희망의 불빛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숙소를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린 후에야 희미한 불빛이 보이고 중간중간 가로등 불빛도 보이기 시작했다. 숙소는 다행히 도시와 접해 있어서 밝은 불빛들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은 달의 계곡과 마녀시장 그리고 케이블카 탑승 등 빡빡한 일정이다.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잠시 쉬다 일어나 달의 계곡으로 출발했다. 새벽에 들어올 때 어두워서 볼 수 없었던 도시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길은 우리나라 설악산을 넘을 때처럼 굽이굽이 곡선을 그리며 촘촘하게 형성된 도시 속을 달려 능선으로 향했다. 길가에 전봇대처럼 크고 긴 꽃대에 꽃을 달고 있는 용설란이 띄엄띄엄 보였다. 달리는 버스 속이라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렇게 고도가 높고 척박한 곳에서 긴 꽃대에 꽃을 달고 있는 용설란이라니...

‘달의 계곡’은 비바람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신비로운 지형으로 독특한 암석 구조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풍경이 달의 표면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라파즈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물리적 인공물들이 모두 지워진 상태를 상상해 보았다. 영락없이 지구가 아닌 지구 밖의 다른 행성일 것 같았다. 우선 절구처럼 생긴 도시가 그렇고, 나무 한 그루 없이 신비로운 지형의 ‘달의 계곡’이 그렇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뷰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라파즈는 도시의 아래 지역은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부촌이고, 도시의 높은 곳인 그러니까 절구의 가장자리 쪽에는 빈민들이 사는 지역이라고 했다. 능선까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풍경은 초등학교 때 여러 가지 색종이를 오려 붙여 만들었던 모자이크처럼 알록달록 예뻤다. 그리고 버스 유리창 너머로 케이블카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특이한 광경 또한 멋진 풍경이었다.

도시 중심의 케이블카


우리는 볼리비아의 전통적인 문화 중 하나인 주술문화를 보기 위해 마녀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입구 가게에는 통째로 말린 알파카 새끼와 라마 새끼가 걸려 있었다. 그 외에도 물약, 허브, 부적 등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팔고 있었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말린 알파카 새끼나 라마 새끼를 문에 걸어두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주술을 믿고 마녀 시장에서 이것들을 사간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개업식에 북어를 무명실에 감아 걸어두던 풍습이 떠올랐다.

잉카의 여인들

* 김양숙, 1990년『문학과 의식』시 등단, 2009년 [한국시인상] 수상, 2017년 [시와산문 작품상] 수상, 2013년 부천문화예술발전기금수혜. 2024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비 수혜. 시집 『종이 사막』,『지금은 뼈를 세는 중이다』,『기둥서방 길들이기』,『흉터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고래, 겹의 사생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