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기(연세대학교 외래교수)
‘입시 전문가’와 ‘교육 전문가’ 사이, 우리가 외면한 질문
2025년 여름, 우리 교육의 혼돈이 심화하고 있다. 수행평가 전면 재검토를 주장하는 입시 전문가 유튜버의 발언이 논란의 불씨를 지피더니, 임태희 경기 교육감은 ‘수행평가 전면 재구조화’를 선언하며 제도 개편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여론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외치며 지필평가 확대를 놓고 간을 보고 있다. 낯익은 풍경이다. 몇 해 전 수시·정시 비율을 놓고 벌어졌던 끝없는 논쟁이 다시 되풀이되는 듯하다. 교육은 또다시 입시의 하위 범주로 전락하고, 유초중등교육을 경험한 진짜 교육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쉽게 묻힌다.
우리는 언제부터 교육 문제를 논의할 때, ‘입시 전문가’의 언어를 듣게 되었는가?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는 경험, 명문대 진학 경험, 사교육 경력만으로도 ‘교육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쉽게 주어지는 기이한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다. 그 결과, 교육의 목적은 사라지고, 교육의 수단만이 전면에 남았다. 성적과 대학 진학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객관적 증거’는 마치 성적만이 유일한 가치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다.
수행평가는 왜 필요한가
수행평가는 한 아이의 학습과 성장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시도였다. 정해진 시간 내 정답을 고르는 능력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고의 깊이, 창의성, 탐구 태도, 협업 능력 같은 것들을 평가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과정 중심 평가라고도 부르는 수행평가는 제대로 실시할 경우 교육의 본질과 가장 가깝게 맞닿는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논쟁 속에서는 수행평가의 철학이나 취지가 온데간데없다. 지금 수행평가는 ‘주관적이고 불공정한 평가’로 매도되고 있다.
교육계 내부에서 수행평가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니 평가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교사 교육, 평가 설계의 정교화, 기록과 피드백의 체계화는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제도와 시행방법을 보완하여 해결할 문제를 전면 재검토하거나 재구조화하자는 것은 하나의 티끌로 전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비교육적 처사이다. 더욱이 ‘공정’이라는 말로 지필평가의 객관성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교육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가둔다.
입시 전문가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계량화된 성적은 객관적인가? 오히려 성적만큼 불완전한 지표도 드물다. 성적은 단지 ‘측정된 능력의 일면’ 일뿐이며, 교육학적으로는 성적이 어떤 맥락에서 산출되었는지를 함께 해석할 수 있을 때만이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을 들이대며, 그 결과가 곧 능력이며 공정이라 우긴다.
‘누가’ 교육을 말하는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교육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 중 다수는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교육의 본질을 고민하는 교사들의 것이 아니다. 나아가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입시와 사교육의 성공 경험을 앞세운 이들이 목소리를 키운다. 그들은 통계와 그래프, 개인의 경험을 근거 삼아 교육을 논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교육’은 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대학 입시를 통과하기 위한 전략으로서의 교육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미디어에 등장하면서 교육 담론의 대표자처럼 포장된다는 점이다. 방송 프로그램, 유튜브, SNS에서 가장 자주 호출되는 ‘교육 전문가’들이 실제로는 입시 컨설턴트나 사교육업체 대표들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들은 교육정책에까지 목소리를 낸다. 교육은 이제 교사나 교육학자의 손을 떠나, 여론이라는 이름의 시장에서 거래되는 ‘소비재’ 일뿐이다.
일본의 지성 우치다 타츠루는 "교육개혁은 움직이는 자동차를 멈추지 않고 수리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지 비유를 넘어 교육이라는 영역의 특수성을 정확히 포착한 통찰이다. 교육은 사회 전체와 맞물려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누적된 제도, 문화, 습관이 얽혀 있어 단번에 고칠 수 없다. 성급한 개편은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한다. 특히 지금처럼 일관된 철학 없이 대중의 불만에 반응하여 정책이 출렁일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교사에게 돌아간다.
최근 이진숙 교육부 장관 지명자를 둘러싼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수십 년간 대학에 몸담았지만, 유·초·중등 교육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장 교사들이 느끼는 좌절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정책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이가 현장의 생리, 아이들의 실제 삶, 교사의 노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 정책은 공허한 선언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시,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아울러 교육은 도구 이전에 사유이고 해석이며 기다림이다. 이 말은 현재 우리가 잃어버린 교육의 정의를 다시 상기시킨다. 교육은 아이 하나하나의 성장 여정을 섬세하게 살펴보며, 그 가능성을 발견하고 조력하는 행위다.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 느리고 복잡한 배움의 길을 믿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 인내가 교육의 '윤리'다.
그러므로 교육을 논하려면, 단지 드러난 성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교육 전문가란, 그 과정을 감당해 본 사람이다. 시험을 잘 보는 법을 가르쳐 본 사람 말고, 시험이 아이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질문해 본 사람 말이다. 교육정책은 ‘점수’를 기준으로 설계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선발적 교육관에 포획될 것인가
입시 위주 성적 경쟁으로 회귀할 것인가, 아니면 교육 본연의 목적을 다시 붙들 것인가. 이 선택은 단지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 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성적을 잘 받는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일. 그 일을 ‘공정’이란 말로 깎아내려선 안 된다.
교육을 공정하게 만드는 것은 단일한 기준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포용하는 ‘구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가의 객관성 강화가 아니라, 교육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인식 전환이다. 교육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주제다. 하지만 누구나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다만, 그 자격은 입시를 통과한 경험이 아니라, 아이들을 진심으로 마주한 경험에서 시작된다.
교육은 기다림으로 희망을 만드는 긴 여정
학습의 결과는 즉시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내면화한다. 듀이가 말한 ‘성장이란 경험의 연속적인 재구성’이라는 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즉시적, 가시적 결과를 성마르게 요구하는 풍경은 선발적 교육관에 포획된 한국 교육의 슬픈 현주소다.
학습의 결과는 즉시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내면화한다. 듀이가 말한 ‘성장이란 경험의 연속적인 재구성’이라는 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즉시적, 가시적 결과를 성마르게 요구하는 풍경은 선발적 교육관에 포획된 한국 교육의 슬픈 현주소다.
당장의 쓸모만을 추구하며 경제적 가치에 기대는 교육은 아이들을 점점 더 전인적 발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강남 지역의 학생들이 서울의 타 자치구에 비해 정신과 진료 횟수가 무려 3.8배에 달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동학대에 다름없는 7세 고시, 초등의대반의 성업을 보고도 성적 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꼴이다. 비판하다가 닮아가는 악순환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인가.
교육은, 기다림으로 희망을 만드는 길고도 긴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