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 교사)
“야구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How can you not be romantic about baseball?)”,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첫 번째 대사는 영화 ‘머니볼’에서 주인공인 빌리 빈 단장이, 두 번째는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포수 요기 베라가 한 말이다. 야구 경기의 극적인 매력을 표현하면서 인생에 빗댈 때 많이 쓰인다. 그것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충분한 근거인 경기 내용에서 비롯된다. 무려 4점. 1대 0으로 끝나는 경기가 즐비한, 그래서 어떨 땐 한 점 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경기에서 저 정도의 리드로 앞서가는 팀일지라도 마지막 회의 한 타자만 막아내면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방심할 수 없다. 만루에서 홈런 한 방에 저 점수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야구 얘기이다. 우리 학교에는 야구부가 있다. 중학교 야구 선수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아름답고 기특하다. 지금은 프로야구 시즌이 한창이다. 헌데 애정하는 팀이 선두이다. 그래서 야구를 떠올린다. 진로와 함께.
야구는 진루를 해야 점수를 얻는 경기이다. 인생은 진로를 전개하며 성취해 나가는 과정이다. ‘진루(進壘)’와 ‘진로(進路)’. 루(壘)는 ‘진, 또는 성채’이다. 로(路)는 ‘길’이다. 상대의 진지와 성을 점유해 나가는 것은 삶의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맬 순 없다.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다. 모든 건 단계가 있고, 절차가 있다. 아무리 급해도 3루부터 밟을 순 없다. 때론 진루 시 중간 루를 밟지 않고 주루하는 주자에게 가혹할 정도로 큰 비난이 가해진다. 인생에서도 그러다 탈 난다.
포수는 흔히 안방마님으로 불린다. 모든 수비수를 바라보는 반대 방향에 앉아 있기에 그들을 지휘하며 투수를 리드한다. 어차피 시작은 투수가 공을 던져야 한다면 수비의 종착점은 포수가 공을 받는 데 있다. 그게 투수던, 야수던. 그래서 수용력이 있는 사람이 안방의 마님이어야 한다. 그 사람이 나머지 팀원을 통솔해야 한다. 공을 뿌리는 투수에게는 크게 요구되지 않은 덕목이 포수에게 필요하다. 삶에서도 그렇다. 공동체를 이끌고 가려면 받아줄 줄 알아야 한다. 수용력이 필요하다.
야구는 한 팀에 9명, 모두 합해 18명이 치르는 경기이다. 그 옛날 야구 규칙을 만들 때 사교 클럽 ‘니커보커스’의 신사들이 오랜 논쟁 끝에 내린 결론이다. 야구 중계를 볼 때면 ‘6-4-3의 병살타’ 등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수비수들의 포지션을 숫자로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인 투수가 1번, 포수는 2번, 그다음 내야는 시계 반대 방향의 순으로 숫자를 부여받는다. 1루수 3번, 2루수 4번, 3루수 5번, 특별한 유격수는 6번이다. 그다음 외야는 시계 방향 순이다. 좌익수 7번, 중견수 8번, 그리고 우익수 9번이다. 번호로 수비수를 정한 건 경기 기록을 작성하기 위함이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이다. 그 기록을 토대로 한 확률의 경기이기도 하다. 감독은 기록을 쌓은 통계로 그럴듯한 작전을 세운다. 아이들의 진로에는 무수한 기록이 남는다. 신체 치수, 성적, 각종 검사, 일기, 학생부, 사진 등. 우린 지나온 날들의 자취로만 불확실하게나마 미래를 예견한다.
포지션이 다양한 대표적 경기이기에 불의의 사고나 좌절을 극복한 사례들이 유독 많은 게 야구이다. 축구 선수가 다리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는다면 그다음은 암울할 뿐이지만 투수는 팔 인대의 기형을 진단받은 후에도 최고의 투수로 변신한 사례가 있다. 바로 사이영상까지 수상한 전설의 너클볼러 R.A. 디키와 같은 선수들이다. 달리기가 느리면 지명타자를 전문으로 할 수 있고 장타력이 부족하면 빠른 발을 이용해 단타와 도루 중심의 타자가 될 수 있다. 투수를 하다가 타자가 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포지션의 변신이 자유로운 점에서 재기와 극복이 유독 많이 나타나는, 그래서 진로와 인생에 많은 감흥을 줄 수 있는 경기가 또한 야구이다.
포지션의 변신만큼이나 선수들의 특징별 대응도 변수가 많은 종목이 야구이다. 왜 왼손타자는 우완투수에 유리한가? 일단 왼쪽 타석에서 좌완투수의 투구는 심하면 등 뒤에서 날아오는 궤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반면, 우완투수의 공은 훨씬 열린 시야에서 들어오는 공이기에 때리기 유리한 측면이 있고, 오른손 타석보다 한 발짝 정도 1루에 가깝기 때문에 유리한 면이 있다.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우완투수의 익숙한 공이 치기 쉽다는 견해도 있다. 그럼, 좌완투수가 나오면 타자는 오른손 타자로 바꿔야 할까? 그렇게 바꾸는 전략을 ‘플래툰 시스템(Platoon System)’이라고 한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이는 선수들이 많이 있다. 진로와 삶에서도 우린 얼마나 자주 ‘맞춤식’ 주문을 원하는가! 나에게 맞는 직업, 맞는 일, 맞는 계획은 그러나 때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다. 어떤 선수는 왼손 타자인데 수비할 땐 오른손으로 공을 던진다. 원래 오른손잡이였는데 타석에선 연습으로 바꾼 것이다. 왜 세상은 오른손투성이냐고 불만하지 말라! 그럴수록 방망이를 왼손으로 휘둘러야 한다. 야구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의 철학이다.
야구 시청의 즐거움에 빠져 진로와 인생까지 너무 멀리 가버렸다. 총 18번의 공격과 수비를 교환하면서 그만큼의 중간 광고를 할 수 있는 친자본주의적 경기에서 어느덧 끝나는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지루한 경기로 현대인들의 기호를 따르지 못한다는 질타를 받고 있지만 야구를 볼 때면 인생이 그려지기에 뭉클해질 때가 있다. 진로를 개척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넓고 거친 삶의 들판(野)을 뛰어다녀 왔던가! 수많은 계획과 시도와 노력과 좌절을 겪으며 성채(base)를 돌고 돌아 과연 각자의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만들 수 있었나?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야구나 삶이나 진로나 어차피 우리를 맞이해 줄 따뜻하고 편안한 안식처인 집(Home)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