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처음 도덕경 이야기를 시작할 때 3~40회로 멈출 예정이었는데 하다 보니 벌써 70회에 이르렀다. 필요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명절, 그리고 …… 객지에 살던 아이들이 어렵게 시간을 맞춰 지난 토요일 저녁에 같이 왔다가 사정상 설날인 오늘 다시 각자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 즐겁게 지내다가 가고 나니 빈 방이 자꾸 쳐다 보인다. 인지상정이다. 오고 가는 일이 모두 다 그러하다.
내가 아직 부모가 되기 전에는 부모의 마음을 몰랐다가, 부모가 되어 그 마음을 희미하게 알았을 때, 이미 나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신 후였다. 나의 아이들도 나와 같은 과정을 겪으며 이런 마음이 쌓여갈 것이다. 역시 사람의 일이다. 부모의 마음, 그 본질은 무엇인가? 동물적 보호본능에서 시작되어 겹겹이 쌓인 신뢰와 지지, 그리고 끝없는 일방적 염려가 복잡하게 얽힌 마음이라고 가정해 본다.
그런데 노자께서는 돌연 도덕경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부모 자식 사이의 효도와 자애의 의미를 흔든다.
六親不和, 有孝慈(육친불화, 유효자) 가족이 불화하자 (마침내) ‘효’와 ‘자’가 있게 되었다. (도덕경 18장 부분)
노자에게 효孝와 자慈는 어떤 의미였기에 불화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자식이 부모를 위하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자식 간의 당연한 마음이다. 아마 노자 역시도 이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런 효孝와 자慈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불편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자. 성리학으로 나라의 근본을 세운 조선 시대에는 이 효孝와 자慈가 모든 일의 근본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대단히 역설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조선 시대만큼 이 효孝와 자慈가 필요했던 시기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왕실)와 권력층의 비리를 감추고 본질을 호도糊塗하기에는 개인적인 윤리인 효孝와 자慈를 강조하는 것만큼 멋진 도구가 없었을 것이다. 왕실의 피 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효孝와 자慈라는 수단 혹은 방책으로 가렸을 뿐이다. 하기야 아주 최근, 60~70년대 개발독재 시절에 우리는 유난히 이 효도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살았다.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다.) 권력층의 온갖 부정함을 감추기 위해 일반 국민에게 개인적인 자유에 해당하는 효孝와 자慈를 강요한 것과 다름이 없다.
도덕경의 ‘불화不和하자 효孝와 자慈가 있게 되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혹은 다른 목적을 위해 강요된 효孝와 자慈라는 것이다. 도덕경 18장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족 간의 이루어지는 마음의 작용을 누군가(그것이 비록 국가나 권력이라 하더라도)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도덕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2600년전 노자 당시에도 그러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부분만 한정해서 이야기한다면 인류역사의 발전은 미미하거나 없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무리가 아니다.
열차를 타고 떠난 아이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설경이 참 좋다면서 엄마 아빠 점심 맛있게 드시라는 이야기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향하는 마음과 아이들이 우리 부부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균형을 이룰 때, 아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 낼 것이며, 우리 부부 역시 평화롭게 우리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Ferdinand Georg Waldmüller(1793~1865)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비더마이어 시대의 대표자. 그림은 1859년 작 Rückkehr von der Kirchweih(교회)박람회에서 돌아오다.아마도 시골마을 동네 잔치를 마치고 교회 마당으로 돌아오는 풍경인 듯 하다.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