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81. 지치지 않겠다는 다짐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5.01.17 07:20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대학 때 학보사에서 객원 만화 기자를 했다. 우리 학교 신문의 네 컷 만화와 만평을 격주 간격으로 그렸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만 쉬고 4년 동안을 꾸준히 연재하면서 시의적절하거나 재미 코드가 맞을 땐 때때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전공과 무관한 활동이었지만 그때는 이 분야가 나에게 맞는 길은 아닐지 잠시 생각했었다. 그래서 학교 주변에 화실을 찾았다. 데생부터 제대로 그림을 배워보고 싶어서였다. 당시 화실을 운영하던 선생님은 중고등학생만을 지도하다가 대학생이 찾아오니 일단 비용은 내지 말고 다녀보라고 했다.

선 그리기부터 시작했다. 어느 분야나 기초 단계는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심오하다. 하루 종일 캔버스에 선을 그리고 있자니 일종의 수행처럼 느껴졌다. 어깨와 팔, 그리고 허리가 아팠다. 그래도 일정한 선을 그려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에 그 단계는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기본자세와 근육을 만드는 과정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문제는 기본 도형에서 터졌다. 나는 분명히 이렇게 보인다고 그렸는데 선생님은 단호하게 꾸짖으셨다. 저게 어떻게 이렇게 보이냐고.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자, 중고등학생인 동생 회원들이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제가 보기에도 어젠 선생님이 좀 심하셨어요.”

그리곤 화실을 뛰쳐나왔다. 별다른 인사도 없이 나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흑역사이다. 돈을 안 받은 건 선생님의 선견지명이었다. 나는 흔한 잔소리 한 번에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는 무력감에서 한동안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서 성인용 적성 검사를 받고 알았다. 내가 시각 공간 지각에서 정말 취약한 역량을 갖고 있음을, 그래서 어디를 갈 때 헤매기 일쑤인 지독한 길치임을. 재능이 부족하다는 게 오히려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학교 신문에 그렸던 만화는 지나친 엉터리 그림일 수 없다. 어린 시절에 그림을 곧잘 그린다고 상도 제법 받았다. 만일 그때 그 고통을 이겨내고 열심히 연습했더라면 어땠을까. 끈질기게 열심히 살지 않은 나를 재차 구박하는 모드는 잊을만하면 작동된다.

오랜만에 TED에서 안젤라 더그워스의 ‘Grit’ 영상을 보았다. 무려 11년 전에 만들어진 그 영상은 현재 조회수로 1,538만 회를 기록 중이다. 이번엔 책도 읽었다. 그녀의 책은 우리나라에서만 그간 150쇄(50만 부)를 넘게 판매되어 기념판까지 나왔다. 우리말로 하면 ‘투지’와 비슷한 단어인 ‘그릿’은 지속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나는 평소 지나친 ‘노오력’ 주의에 불만이 있었다. 무엇이든 타고난 유전자와 재능이 영향을 주기에 안 되는 일에 과도한 집착을 하는 게 삶을 힘들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행할 수 있는 태도는 충분히 좋은 덕목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재능을 핑계로 혹여나 성실한 삶의 의지를 기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심리학 연구를 토대로 한 자기 계발 분야의 영상이나 책을 대할 때 늘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은 “그래서, 다 좋은데 어떻게 그런 능력을 기를 수 있는데?”였다. ‘그릿’이 있으면 성공하고 심지어 행복해질 수 있다고까지 하는데, 쉽게 말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오랜 기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데, 그런 주장에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어떻게 그런 능력을 기르고 가르칠 수 있느냐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와 값싼 응원에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책 ‘그릿’에서 소개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현실에 적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자신을 천재로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환경 덕택에 매사 열심히 노력해서 현재의 성취를 이뤘다는 저자의 자기 고백에서부터 책에서는 뛰어나지 않은 재능을 갖고 있더라도 성공한 사람들의 수많은 사례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그릿’이 있었음을 꼼꼼한 연구와 분석으로 입증한다. 데이터가 입증하는 근거들은 신뢰를 주기에 효과적이다. 핵심적인 ‘그릿’ 키우기의 방법은 1. 관심사를 분명히 하고 2. 그것을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키우며 3. 가능한 개인의 이해관계와 함께 이타적 의의로 확대하고, 4. 실패했을 때 그만두지 말고 희망을 잃지 않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각 단계의 내용들을 나의 삶에 적용하며 최대한 실제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책에 따르면 사람들은 노력을 존중하지만, 재능에 더 큰 신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재능 중심주의는 자칫 성공의 다른 요소들을 무시할 수 있는 위험을 갖는다. 여기서는 니체의 말이 인용된다. “우리는 과정을 무시한 채 결론만을 본다.” 선천적 재능을 신화화함으로써 우리는 경쟁에서 면제받을 수 있고, 현재 상황에 안주할 수 있다. 이는 노력하지 않는 삶에 좋은 핑계가 될 수 있다.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해도 안된다는 느낌이 들 때는 재능의 요소를 무시할 순 없다. 미흡한 결과를 무조건 노력 부족으로만 탓하면 안 될 일이다. 모두가 열심히 사는 세상이 없는 만큼, 모두가 대충 사는 세상도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노력한 사람들, 열정과 끈기로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례를 들으면 자극이 된다. ‘관심사를 분명히 하라’는 주문에도 그것이 마치 계시처럼 떨어지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키워나가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대충 집적거리고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자신에게 맞는 게 없다고 투덜대지 말라는 경고로 읽었다. 매사가 그렇다. 어느 정도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데 자신에게 맞는 분야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기대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이다.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그릿’ 향상법들이 있었다. 일명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ctice)’이 그것이다. 운동할 때도 자주 듣는 말이다. 영혼 없이 반복하는 연습보다는 어떤 부위를 어떻게 발달시킬 것인지 생각하며 하는 연습이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이 크다는 것. 일전에 수영을 다녔는데, 하루는 다이빙 강좌가 없어서 코치님이 그 풀에 부표 줄을 걸고 짧은 거리를 무한히 돌리는 연습을 시킨 적이 있다. 물이 깊으니 숨이 차면 잠시 멈추고 걸으며 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엔 입수마저 주저하던 회원들은 어느덧 물속을 보면서 여유를 찾기에 이르렀다. 나 역시 깊은 풀에서 더 강해진 부력을 느끼며 중간에 쉬지 않고 코스를 돌았다. 평소보다 분명히 힘든 하루였지만 강습을 다 마치곤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에서 말한 ‘의식적인 연습’과 ‘좋은 부모와 선생님, 그리고 코치의 중요성’이 적용된 사례이다.

그밖에 ‘원하는 노력을 일상의 루틴으로 만들어서 강화하기’, ‘타고난 재능보다 노력과 학습을 칭찬하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갖기’, ‘자녀에게 무조건적 지지를 하되 부모로서 해야 할 요구를 잃지 않기’ 등의 제안들은 울림이 있었다. ‘그릿’을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 역시 ‘행해야’만 실현될 수 있기에 실천의 벽에 부딪힐 수 있다. 책으로부터 아무리 자극을 받는다 한들 실천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릿’ 지수 측정을 위한 질문 10가지를 실시해 보니 5점 만점에 2.8점이 나왔다. 이는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적은 수치이다. 무언가를 끈기 있게 열심히 하지 못하고 대충 살았다는 지난 삶에 대한 자책이 객관화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만든 문항이기에 그들의 평균값에 무조건 대입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끄러움이 영향을 준 수치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지나온 삶에서 나는 과연 열심히 한 게 없었나 살펴보았다.

매 순간 열정과 끈기로 최선을 다한 삶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니 힘들어도 버티면서 무언가 이루려고 했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더그워스도 이 책의 말미에는 그런 점을 강조한다. 열심히 사는 것은 수많은 삶의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고. 선량함, 사회적 관계, 호기심 등의 요소들도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여지를 남긴 점은 책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었다. 분명한 건 어떻게 해야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습 또한 삶을 열심히 살기 위한 노력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굳이 열심히 산다는 자부심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책과 같은 도움으로나마 지치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는 상담실 문턱을 넘는 아이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시선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시대에 더욱 필요한 마음가짐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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