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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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30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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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우금티를 넘은 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간 날이었다. 당시만 해도 성능이 좋을 것 없는 버스가 비포장의 까칠한 경사를 그러릉 그러릉 하며 노인네 가래 끓이듯 힘겹게 올랐다. 내일 시험을 치러야 하는 입시생의 마음과 같은 길이었다.
그 우금티가 그렇게 아픈 고개였다는 것을, 우금티에 동학혁명 기념탑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고등학교에서 국사 공부를 하면서 알았다. 그 후 가끔 밤에 우금티 동학혁명 기념탑에 가서 머리를 조아린 적이 있었다. 밤에 혼자서 우금티로 올라가는 길은 당시 유신 시절 불경스러운 일이었지만 역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잊었다. 동학혁명은 진 것이므로, 실패한 것이므로, 진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학교에서 배웠으므로 잊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모두가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학교 선생을 하면서 알게 되면서, 반드시 이기고 성취하는 것만이 사람 사는 모습의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다시 동학을 생각했다.
왜 동학혁명 기념탑의 글과 글씨가 어용 사학자의 글과 독재자의 글씨인가를 생각하면서 변혁과 혁명의 사상과 흔적조차 독재자의 의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포장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작은 꿈과 저항의 외침은 결코 산화散化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갑오년 동학혁명이라는 민중의 함성은 우금티에서 진압되지 않았다. 수운 최제우의 신원금포伸冤禁捕의 애소哀訴를 위해 모인 공주취회公州聚會에서 최초로 촉발되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응징하는 전봉준의 의거로 불이 붙은 동학 농민혁명은 우금티를 결국 넘지 못했지만, 그 정신과 함성은 결단코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의병으로, 3.1 만세 운동으로, 독립군과 촛불 정신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개벽세상을 꿈꾸던 당시 사람들의 정신과 흔적을 찾아 그 땅 공주를 두 발로 걸으면서 마음을 모은다.(글 전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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