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우리 학교 과학 선생님이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게 당장 어디에 쓸모 있는 게 아니라서 무의미하게 느끼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현실의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괴리감이 있기에 가르치기에도 어려운 것 같다는 작은 불평을 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당장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진로와 진학을 가르치기에 아이들에게 가장 도움이 큰 과목으로 내 과목을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필요와 쓸모로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평가한다면 오히려 내가 다루는 내용들은 조금은 멀리 있는 피상적인 것들이다. 아이들에게는 오늘 배워서 당장 시험을 치르고 자신들의 진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성적 산출에 영향이 큰 교과목들이 그 내용과 무관하게 분명한 용처를 갖고 있는 쓸모 있는 과목이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고 방학을 앞둔 학기 말에는 중고등학교를 불문하고 선생님들에게 고통의 나날들이 펼쳐진다. 교직에 들어와서 첫해부터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기말고사 시험이 끝나고 펼쳐지는 아이들의 무기력과 나태함은 정말이지 무슨 수단을 써도 해결이 안 되는 난제이다. 하지만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작년까지 행해졌던 중학교 1학년 자유학년제에서는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없었기에 방학 바로 전날까지 충실한 수업 활동이 가능했다. 14년 만에 중학교에 와서 학기 말에도 활기찬 수업을 경험하고는 시험의 의미를 새삼 다시 생각할 지경이었다. 아! 아이들에게 공부의 의욕을 고취하고 격려하기 위한 의도로 시험을 보는 거라면 번지수가 틀렸구나. 오히려 시험이 없으니 아이들은 다 내려놓고 싶은 허무한 순간도 모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1학기에는 1학년을 지도하고 2학기에는 3학년을 지도하는 나의 입장에서도 학기 말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다. 평소에 성적 산출의 부담이 없는 내 수업에도 아이들의 흐트러진 모습은 예외가 없다. 일단 자리를 바꿔 앉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우리 학교의 경우는 딴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평소라면 어쩌다가 경고를 줄 사항이지만 학기 말에는 다르다. 예전처럼 영상 자료에만 의존할 수 없다. 영화 보여주기는 가장 비난을 받는 학기 말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은 15분이 넘어가면 아무리 의미 있는 영상이라도 긴 호흡으로 느끼고 지루해한다. 그리고 만일 휴대폰을 걷지 않는다면 큰 화면보다는 각자의 손바닥에서 자신만의 화면에 집중하길 좋아한다. 어쨌거나 아이들에게 학교에 온 의미를 잃게 하지 않으려고 선생님들은 오늘도 다방면으로 새롭고 참신한 수업을 고심 중이다. 아무래도 활동 중심의 수업이 효과적이라는 의견은 이 시기의 공통된 견해이다.
당장에 쓸 점수를 확보하기 위한 수업 활동과 공부라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의 가치는 허무하기 짝이 없다. 정말 아이들은 시험이 없으면 공부할 의미를 못 느끼는 걸까? 그래서 나 자신에게도 물으니 쉬이 답변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난다. 나 역시 고등학교는 고사하고 중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인수분해를 스무 살이 넘어서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과학 시간에 배운 플레밍의 왼손 또는 오른손 법칙이나 옴의 법칙 등을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지금 떠올리는 게 수십 년 만이다. 그나마 영어 공부 같은 외국어 공부는 쓸모가 있다 해도 제2외국어로 배운 독일어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써먹은 적이 없고, 지금은 중세 국어로 불리는 국어 시간에 배운 고문 즉, 훈민정음 문자 해석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아이들에게 감정 이입이 되려는 순간이다. 나 같아도 시험이 끝나면 마냥 자고 싶겠다.
그래서 교육과정을 찾아보았다. 과연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교과목의 목표는 무엇인지, 우리는 그 교과목을 왜 배우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다음은 2022년 개정 교육과정의 몇몇 교과목 목표이다. 우선 국어과 교육 목표이다. “국어 의사소통의 맥락과 요소를 이해하고 다양한 의사소통의 과정에 협력적으로 참여하면서 언어생활을 성찰하고 국어문화를 향유함으로써 미래 사회에서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국어 능력을 기른다.” 무척 고매한 목표임이 분명하나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국어 수업을 열심히 받았다면 누구나 들었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고 뜻이 불분명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명쾌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란 기대를 하지만 지금도 뉴스를 볼 때 도대체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했다는 건지, 안 했다는 건지 애매하고 혼탁한 언어의 혼란으로 복장이 터질 경우가 많은 걸 보면, 그것도 배웠다는 사람들의 언어가 그런 걸 보면, 국어 교육의 목표는 정말 요원해 보인다.
다음은 수학과 교육 목표이다. “수학의 개념, 원리, 법칙을 이해하고 수학의 가치를 인식하며 바람직한 수학적 태도를 길러 수학적으로 추론하고 의사소통하며 다양한 현상과 연결하여 정보를 처리하고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수학 교과 역량을 함양한다.” 수학적으로 추론한다는 건 감정과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을 추구한다는 것일 텐데 이 또한 뉴스를 보면 당최 어떤 근거로 저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힘 있고 배웠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실제에선 이뤄지기 힘든 목표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목표 달성의 수준으로 본다면 허탈한 현실이다.
영어과는 어떠한가. “다변하는 미래 사회를 대비하여 언어와 문화의 배경이 다른 세계인과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역량을 기르고 학생의 삶과 연계된 영어 의사소통 역량을 함양하는 것이다.” 멋진 목표다. 하지만 영어식 사고랍시고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아메리칸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회주의적 태도에서는 저 목표 역시 요원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10.29 참사 때 굳이 외신기자들에게 영어로 어색한 비유를 했던 정부 고위 관계자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가 최악의 잼버리 행사에 가서 자신이 미국 유명 대학 출신임을 무려 ‘영어’로 나불거리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끝으로 과학과의 교육 목표다. “자연 현상과 일상생활에 대하여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과학적 탐구를 통해 주변의 현상을 이해하고,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과학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데 민주 시민으로서 참여하고 실천하는 과학적 소양을 기른다.” 멋진 목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교과목들의 저 고매한 목표를 살펴보니 왜 아이들이 시험이 끝나면 잠을 자는지 알 것 같다. 배움의 이상은 현실과 너무도 멀리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 처음에 불평했던 동료 교사를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저 배움의 목표들이 꼭 당장의 순간에 실현되지 않아도 그 배움이 한참 지나고 난 후에도 남는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고등학교 독일어 시간의 끝자락에 느꼈던 독일 문화의 향기에서 그들의 사유와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고 수학 시간에 배웠던 여러 개념과 문제 해결 과정은 분명히 얼마간에 논리적 사고와 추론 능력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믿는다. 국어 시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때 배운 시와 문학의 감동은 분명히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고 훈민정음과 같은 내용으로 알게 된 한글의 원리와 아름다움은 당연히 우리 민족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과학은 지난번 얘기한 고3 때 지구과학 시간의 추억으로 충분하다. 과학적 사고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짜릿한 경험을 했으니 말이다.
배우고 가르치는 행위가 당장의 편의와 효용에 의지하는 오늘날에 오히려 아쉬운 건 배운 대로 살지 않고 바라는 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현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잘 배웠다는 징표로 높은 시험 성적을 확보한 되바라진 어느 학생이 자라고 자라서 한 사회의 큰 힘을 얻게 되었을 때의 상황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성적이란 당면 목표를 잃은 진공 상태와도 같은 학기 말에 가르침과 배움이 잃지 말아야 할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되묻고 상기하고자 한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듯 난망한 학기 말 수업 활동에서의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들은 분명히 교과목마다의 목표 실현을 위한 반전의 계기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더불어, 배운 것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이상한 삶을 더 이상은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역시 함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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