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 교사)
가수 양희은의 오래된 포크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C-Am-Dm-G7-C 의 코드 진행으로 부르고 연주한다. 일명 Ⅰ-ⅵ-ⅱ-Ⅴ-Ⅰ도 전개이다. 기타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코드를 잡는 운지와 이동이 편해 추천하는 곡이다. 처음 코드를 배울 때 코드 진행의 원리를 터득해 보겠다고 화성학 책을 펼쳐 본 적이 있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음표들 속에 길을 잃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전공책도 열심히 읽지 않는 주제에 어울리지 않은 호기였다. 그저 기타 악보에 표기된 코드를 튕기고 노래하며 연주하는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인 것을, 그래서 코드 진행을 머리로 외우고 기타를 튕기고 반주하며 노래하길 한 두 해가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당시 유명했던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이현석’의 곡, ‘변하는 마음’으로 기억한다. 록발라드 곡이었던 그 노래를 부르면서 나도 모르게 어울리는 코드를 잡았고 이어서 곡이 끝날 때까지 틀리지 않고 반주를 했다. 휴식 중이었던 친구들은 ‘오~호’하며 격려해 주었고, 처음으로 코드 진행을 머리가 아닌 귀와 몸으로 체득한 신기한 경험을 한 나는 잠시 기분 좋게 그 순간을 즐겼다.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그때 깨달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기타라는 악기와 몇 개의 음을 동시에 잡는 코드, 그리고 노래의 어울림이 내 몸으로 들어와 뒤섞이다 어느덧 질서를 잡은 느낌이었다. 작은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평생에 극장에서 두 번 본 영화는 손에 꼽는다. 1999년. 세기말이라고 불리었던, 이제는 약발이 다해 별로 회자되지도 않는 전설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지구 멸망의 해라고 선언했다던 그 해였다(그러나 그 이후로 지구는 멸망하지 않고 무려 25년째 살아있다). 뒤이어 밀레니엄 버그 등의 공포를 앞둔 어쨌던 음울하고 불안했던 그해에 지금은 자매가 된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영화 ‘매트릭스(Matrix)’가 개봉했다. 전화선으로 현실과 가상을 이동한다는 정도의 사전 정보만을 갖고 친구와 무심코 개봉 날 썰렁한 극장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바로 귀가할 수 없었다. 극장을 나와 커피숍에선지 호프집인지 어딘가에서 영화가 준 충격을 곱씹으며 특별한 작품을 만난 날을 기념했다. 며칠이 지나서 친구는 세 번째로, 나는 두 번째로 기꺼이 한 번 더 극장에서 그 영화를 감상했다. 너무나 멋있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25년 전 영화이고 나름 훌륭한 후속작이 두 편 더 나왔지만 첫 작품이 던진 화두와 메시지는 당시 SF 영화계에서 단연 독보적이었고 그 여운은 짧지 않았다. 이제 갓 고등학교에 부임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초짜 윤리 교사에게도 수많은 철학적, 종교적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는 가르침을 준 영화여서 느낌이 남달랐던 것 같다. 영화는 메시아를 차용한 주인공 네오(Neo)의 모습부터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함을 일깨워준 정보사회의 미래와 장자의 ‘호접지몽’, 불교의 ‘유심론’,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까지 수많은 기호들을 활용한다. 거기다가 당시로서는 최첨단 촬영 기법으로 신비로움을 더했고, 무엇보다 우리가 통제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라며 특별한 음악들을 선곡해서 빛이 났는데, 독일 그룹 Rammstein이 부른 ‘Du Hast’, 영국 전자음악 그룹 Propellerheads의 ‘Spybreak’,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 Rage Against The Machine의 ‘Wake Up’을 넣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징하며 끝낸다. 지금 들어도 전율이 일어나는 삽입곡들이다.
영화에서 나온 주옥같은 대사들 중에 당시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모피어스와 주인공 네오가 나눈 대화였다. 프로그래밍 된 가상훈련 공간에서 무술 대련을 하던 중 선지자 모피어스가 네오를 가르치며 한 말이었다. 아직 가상공간에서 자신의 능력을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던 주인공에게 다그치며 그는 말한다. “Don’t think you are, know you are!” 아마도 우리말이라면 “네가 누군지 생각하지 말라, 네가 누군지 알아라!” 정도이겠다. 가상공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는 단계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군지 그 정체성을 알아내는 단계로의 도약을 주문한 말인데 이건 세상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조언이지 싶었다. 생각(thinking)에서 앎(knowing)으로 넘어가는 사고의 발전을 표현했다고도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한 단계 남은 과정을 추가로 제안한다. 바로 주인공이 더 이상 요원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맞서기 위해서 돌아설 때 누군가 묻기를, “지금, 뭐 하는 거죠?” 이때 다시 모피어스의 말 “He’s beginning to believe! (그가 믿기 시작했어!)” 어느덧 자기를 아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자기 확신에 이른 모습을 뜻한다. 결국 생각은 앎으로 그리고 앎은 마침내 믿음으로 나아간다는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영화에서 표현한 한 인간의 각성(覺醒) 단계에 공감했다.
이제는 파산 후 재기를 노리는 코닥 필름의 예전 광고가 생각난다. 딸이 자전거를 배우는 날을 찍은 사진을 보며 아빠가 추억에 잠기는 내용이었다. 보통의 일상이지만 사진에 남아 특별한 날이 되었다는 광고. 그 광고처럼 우린 대부분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아빠가 뒤에서 잡아주곤 한다. 걱정하지 말라며, 계속 붙들고 있는 시늉만 하는 아빠의 속임수에 안심하고, 어느덧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자전거의 원리를 체득한 후 마침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순간을 만난다. 그다음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아빠가 붙들지 않고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바로 넘어질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스며든다. 그걸 아는 순간, 이미 깨달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학창 시절 기타 코드 진행을 터득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머리로 알려고 애썼던 음들의 전개가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깨닫고 굳어져 확신이 된다. 이렇듯 깨달음의 과정은 무언가 배울 때 얻는 경우가 많다. 수영 영법을 배울 때도 그랬다. ‘이게 과연 가능해?’라는 의구심이 ‘이렇게 하면 어떨까?’하는 시도와 도전을 겪고 난 후 성공하면 이내 확신으로 몸에 장착되어 수년이 흘러도 물속에 들어가서 또 재현할 수 있다. 한 번 깨달으면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대오각성(大悟覺醒). 큰 깨달음의 순간은 문득 찾아온다. 십수 년 전 앞을 못 보는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는 한 야외음악회에서 소프라노 조수미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나는 세계적인 테너와의 공연을 행복해하며 그를 연신 바라보면서 노래하던 역시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잔디에 앉아서 잔잔한 환호를 보내는 시민들에게 깊고 아득한 미소를 띠며 고마운 표정을 보인 안드레아 보첼리를 기억한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장님에게는 미남, 미녀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눈이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사람의 외모에 천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편견을 버리고 그 사람의 심성에만 집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감각은 허상이고 제대로 된 판단을 방해하기에 떨쳐내야 한다는 수많은 경구들을 그렇게 분명히 체득한 적이 이전에는 없었다.
일상에서의 자잘한 깨달음은 학교의 경우 수학 시간에 많이 일어날 것 같다. 풀리지 않은 문제를 씨름하다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기어이 풀었을 때 머릿속의 ‘아~하!’하는 작은 탄성이야말로 깨달음의 모습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와중에 그런 깨달음이 일어날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아직 세상의 경험치가 적을 때 겪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제 반백의 생을 지난 처지에서는 그런 잔잔한 깨달음도, 인생을 바꿀 대오각성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삶은 더 이상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장이 아니다. 요즘은 무언가를 깨닫고 잠시 멍했던 적이 언제였나 싶다. 아이들에게 그런 깨달음의 세계가 있으니 마음껏 고민하고 도전하라고 격려하지만 막상 나 자신이 그런 경험치를 상실하고 있는 상황은 안타깝고 아쉬운 현실이다. 그래도 개선의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자라는 아이들의 생기와 순수함을 관찰하고 사소한 일에도 무심하지 않으며 시간과 몸이 허락하는 대로 가능한 새로운 경험들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삶을 처지고 늘어지게 만들지 않은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며 오늘도 분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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