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어느덧 가을이 왔고 단풍나무 사이로 걸으며 출퇴근한다. 계수나무의 달큰한 향을 맡으며 낮게 깔리듯 비스듬히 비추는 아침 햇살에 부신 눈을 깜빡이면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가 귓가에 지나친다. 요즘은 생각만 해도 유튜브에 관련한 영상이 뜨는 것 같아 신기하고 두려울 때가 있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쇼츠를 본다. 인종 차별이 아직은 극심했을 시절이기에 노년의 루이 암스트롱이 외치는 “What a wonderful world”는 단지 푸른 나무와 꽃들을 향한 것일 뿐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요즘처럼 무르익은 가을날에는 자연 앞에서 그가 찬미한 세상에 그저 공감이 간다. 아름다운 출퇴근길에서 누리는 호사로 인생은 잠시나마 행복해진다.
올해는 기후 위기로 인한 늦더위 때문에 단풍이 늦게 물들고 그나마 붉은색 단풍은 더디게 나타난다고 한다. 서늘한 가을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바로 추워지면 색을 피우기 전에 떨어질 수가 있다. 나무는 추운 겨울이면 생장을 쉰다. 물이 얼면 수분 공급이 힘들기 때문에 가능한 한 뿌리에 그것과 양분을 축적한 채 겨울을 나는 것. 그래서 여름내 바빴던 잎에 분열조직인 ‘떨켜’를 만들어 영양 공급을 차단한다. ‘떨켜’라니! 그 이름의 단호한 순박함이 놀랍다. 이후에 잎이 노화되는 과정에서 초록색 색소인 엽록소가 가장 빨리 분해되어 사라지고 그보다 느리게 분해되는 성분 중 카로티노이드를 갖고 있으면 노란색 잎이, 타닌 성분이 있는 나무에서는 갈색 잎이 되고, 안토시아닌을 생성하면 붉은색 잎이 된다.
질서와 규칙 속에서 통일된 모습에 감흥을 느낄 수 있지만 다채롭고 다양한 것들의 조화로움에 느끼는 감흥도 만만치 않다. 아무래도 앞엣것은 인간의 노력에 많은 면이고 뒤엣것은 자연의 모습에 많은 면일 테다. 자연엔 직선과 네모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각각의 나뭇잎들이 갖고 있는 색들이 같지 않은 모습에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름과 종류가 다른 나무들이니 서로 다른 모습들이야 당연할진대 나는 어느 나무 한 그루 앞에 서서 비로소 같은 나무 안에서도 수만 가지 색으로 미세하게 다른 그의 이파리를 확인하고 놀란다. 나무는 자신의 한 몸에서 뻗어 나온 잎마저 같음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햇볕을 어떻게 받고 서 있느냐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였다. 하긴, 생명이란 본디 ‘빛의 장난’ 아니겠는가. 태양의 힘이 우리를, 생명을 낳고 살게 한다.
고등학교 때 과학 과목 중에 지구과학을 선택하여 학력고사를 치렀다. 나처럼 찐 문과생들은 대부분 생물(현 생명과학)을 선택했지만 그 쏠림이 맘에 들지 않아 달리 한 선택이었다. 사회 과목도 애들이 많이 선택한 사회Ⅰ을 피하고 유독 세계사와 지리를 골랐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많은 곳은 싫어했다. 문제는 다수의 아이들이 누리던 학교 프로그램을 향유하지 못하고 늘 변방에서 홀로 공부해야 했다는 점이다. 문과생들에게는 정규 수업 시간에 아예 지구과학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무슨 용기로 그 과목을 선택해서 대입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그땐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의 당시 지구과학 선생님들은 모두 멋쟁이였다. 둘 다 별명이 성(姓)만 다른 ‘제비’였으니까. 어느 날 3학년 아이들 중에 지구과학 선택한 문과 아이들은 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방과 후에 약속한 교실에 가니 거기엔 학교 도서관에서 눈에 익었던 문과생 외인구단 아이들 몇이 반가운 눈빛을 띠며 앉아 있었다. 뒤이어 친근한 ‘제비’ 선생님 한 분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매주 토요일 오후 수업을 할 테니 얄팍한 교재 한 권을 준비하라고 지정해 주셨다. 그리곤 2학기 석 달 정도를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밥을 먹은 후 문과생들만을 위한 지구과학 보충 수업을 들었다. 그것도 무료로.
아직까지 기억하는 건 P파, S파 하는 지진파의 종류와 지오이드선 등의 용어들이다. 게다가 별의 겉보기 등급, 천구 상에서 황도와 백도 등도 생각난다. 물론 문과의 지구과학 수업이니만큼 그 수준이 일천했을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 수업을 들은 비주류인 나와 친구들은 연신 서로 질문하며 우리 수준에서 사뭇 진지하고 심오한 과학 담론을 나눴다. 거의 반강제로 선택권은 1도 없이 진행되던 평소의 보충 수업은 가끔 땡땡이를 치고 ‘빠따’를 맞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된 지금에도 확신할 수 있는 최고의 수업은 언제나 꼭 듣고자 갈망하는 학생들의 교실에서 나온다는 진리에 비추었을 때 당시의 수업 분위기는 너무 뜨거웠고, 거기에 우리의 ‘제비’ 선생님도 비록 다른 분들은 모두 퇴근한 토요일 오후였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셨던 기억이 난다. 주중 점심시간 등에 삼삼오오 모여 벌어지는 과학 토론에는 지금 생각해도 엉뚱한 질문들이 오고 갔는데 지나치던 이과 동기들도 참여해서 도움을 주곤 했다. 같은 나이인데도 그들의 식견에는 왠지 겸손한 마음이 들었다. 으, 문송해요.
얼마 남지 않은 학력고사를 앞두고 수업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제 얄팍한 교재도 몇 장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마도 후반부 수업은 우주에 관한 단원으로 기억한다. 문과 수준으로 케플러의 법칙과 이론을 배웠던 것 같다. 그러고는 별과 우주를 얘기하면서 찬 기운이 내려앉은 어둑한 늦은 오후에 열 몇 명의 고3 문과 남학생들은 문득 작은 교실을 벗어나 인식의 지평이 무한히 확장하는 묘한 공감대를 느꼈다. 그때 정확하게 무슨 내용에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말씀과 단출한 우주 이론에 멀대같은 남학생들은 잠시 멍해진 순간을 경험했다. 교실은 일순간 진공상태와 같은 기운이 흘렀다. 아마도 저 먼 별의 얘기를 들으며 우리는 중학교 때의 알퐁스 도데나 윤동주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혹은 생텍쥐페리일지도. 그 순간을 공유한 기억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너무 고마운 추억이다. 원하는 수업을 들어서였는지 학력고사에서 지구과학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수업의 말미에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리는 그동안 무료로 노력 봉사해 오신 선생님에게 조그마한 선물이나마 해드리자고 입을 모았다. 지나고 보니 몸만 컸지 아직 세상의 예의를 충분히 모를 어린 나이임에도 그렇게 하는 게 도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넉넉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우리는 쌈짓돈을 모아 선생님께 양말 세트를 선물해 드렸다. 그때, 크게 내색하지 않고 덤덤히 고마움을 표하셨던 찐 남자, ‘제비’ 선생님의 눈에서도 우리는 반짝이는 별을 보았다. 내 열아홉의 늦가을 저녁 추억은 그렇게 지금까지 아련하다.
그때의 느낌처럼, 무수한 별들 중 하나인 지구에서 우리의 지혜로 가늠할 수 있는 태양의 유구한 역사와 기한을 떠올리며 나는 나무 한 그루 앞에서조차 다시 진지해진다. 광속으로 8분이 넘는, 1억 5천만 킬로미터 너머에서 태양이 던지는 빛줄기 마다마다에 수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색을 띠듯이 내가 만나는 우리 아이들의 다양함과 개성에도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3학년의 남학생에게도, 이제 막 입학한 중학교 1학년 학생에게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학교가 존속하기를, 그 속에서 울긋불긋한 나뭇잎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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