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석 시인이 4년 만에 발표하는 두 번째 시집이다. 『흔들리는 어깨를 만지는 일』은 신원석 시인 특유의 정밀한 표현과 비유적 전이,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화법과 독특한 문법을 통해 세계의 다양한 존재면을 드러낸다. 가난에 대한 심층적 천착, 비극적 인식과 실존적 사유, 우울한 기억과 고통의 변주 등은 이번 시집의 내재적 스펙트럼을 이루면서, 어렵지 않으면서도 문학성 있는 시를 추구해 온 신원석 시인의 고뇌와 노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와 ‘시월(詩月) 동인’을 함께하고 있는 위상진 시인은 이번 시집에 대해 “신원석의 시는 힘있고 움직임이 있는 ‘동사’이다. 그의 시는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오래 써온 시인의 틀과 억눌림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하되 변하지 않을 신원석은 이름 그대로 ‘원석’ 그 자체이니까.”라고 말한 바 있다. 다음은 시집 해설의 일부이다.
오랜만에 놀러 온 다섯 살짜리 조카를
집에 두고 출근할 때
그 어린 것이 달려와 내 목을 끌어안고
바닥을 튕긴 발로 내 허리를 칭칭 감아올 땐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자란다는
카리브해의 야자수가 된 것만 같다
바다로 나가고 싶은 꼬마들이
소라로 만든 나팔을 들고 기어오른다는 나무
바다로 떠난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줄기 대신 뿌리를 키운다는 나무
머지않은 어느 날 이 어린 것이
신나게 매달릴 수 있는 나무 한 그루
사라질 생각을 하니
모래 속에 파묻힌 내 여린 뿌리에도
다시 푸른 힘줄 하나가 돋는다
카리브해에는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자라는 야자수가 있다
아이들을 태우고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하늘을 버리고
바다로 눕는 나무가 있다
-「카리브해 야자수」
신원석의 시는 은유적 상징과 전이의 방식이 사뭇 즐겁고 신선하다. 비록 텍스트의 내재적 풍경에서는 쓸쓸함의 정조(情調)가 스며있지만, 전이의 방식이 풍경으로 피어나 즐거움의 양태를 격조 있게 만든다. 시인은 어린 조카가 달려와 목을 끌어안고, 폴짝 뛰어 허리를 칭칭 감아오는 순간,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자라는 카리브해의 야자수를 떠올리고, 자신을 야자수와 동일시한다. 아주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전이의 동일화에 성공하고 있으며, 이 작품의 제3연은 이미지의 전이 양상이 절묘하게 형상화되어 주제적 무게를 가볍게 견인한다.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는데
겨울 달이 울고 있었다
잘못 잡은 손을 뿌리치고
길 잃은 밤거리를 헤매는 눈송이들
눈길을 걷다 보면 알 것도 같았다
하루 사이에도 새하얗게 늙어 버리는 사람들
멀쩡했다가 갑자기 아파졌다는 사람들
날숨만 있고 들숨이 없는 고통이
다름 아닌 신이었다는 사실도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는데
겨울 달이 울고 있었다
흔들리는 어깨를 만지는 일이
신에게 가는 길처럼 아득했다
-「흔들리는 어깨를 만지는 일」
“하루 사이에도 새하얗게 늙어 버리는 사람들”은 삶의 스트레스가 극한에 이르면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적 속설을 따른 표현이다. 그 속설이 허무맹랑한 일만은 아니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 우리는 일생에서 그에 준하는 경험을 몇 번 하게 되어 있다. 하얀 ‘눈길’을 걷다 보면 하룻밤 사이에 ‘새하얗게’ 늙어 버리는 사람들을 알 것만 같고, ‘멀쩡했다가 갑자기 아파졌다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도 넉넉히 이해할 만한 일이 된다. 그 고통은 ‘날숨만 있고 들숨이 없는’ 죽음의 상태와 다를 바 아니며, 결국 신의 이름으로 대체된다. 별들의 흔들림이 반짝이는 빛이 되듯(「삼각형자리 은하」), 실존적 삶의 진실은 ‘흔들리는 어깨’로 표상된다. 고통의 빛인 흔들리는 어깨를 만지는 일, 그것은 위안이 되지 못하는 ‘신에게 가는 길’만큼이나 아득하고 우울하다.
시가 좋아서, 어떻게 하면 시를 놓지 않고 살아갈까 고민하다 선택한 이 직업 앞에,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누군가의 미래를 외면할 수 없는 이 직업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속죄하고 또 속죄해도 지울 수 없는 이 죄의식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나에게서 잠깐이나마 시를 지우는 일. 이놈의 시 따위 확, 개한테나 줘 버리는 것. 그냥 죽어라 수업 준비하고, 그냥 죽어라 강의하고, 그냥 죽어라 교재 만들고, 그냥 죽어라 복습 교재 만들다가, 그냥 죽어라고 늙어가는 것. 그리고 한두 달 사이에 확 늙어서, 개나 줘 버렸던 시를 다시 주워 오는 것.
그것이 내가 학원강사로 사는 법
-「학원강사로 사는 일」
교사나 학원강사의 경우, 미래세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직업 앞에서, 개인적으로 시를 쓰는 정신 팔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교육적 성심을 다할 수 없다는 죄의식 앞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양심적 가책의 절정에서 시인은 “나에게서 잠깐이나마 시를 지우는 일. 이놈의 시 따위 확, 개한테나 줘 버리는 것”이라는 자기 분노와 성찰의 극단에 이른다. 앞에서 언급한 써먹을 수 없는 문학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폭발한 셈이다. 그렇게 시를 죽이고, 죽어라 강사직에 목매다는 삶, 그런 식으로 고생하며 연명하다가 확 늙어서, 틈틈이 ‘개에게나 줘 버렸던 시를 다시 주워 와’ 더듬어 보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자의 ‘학원강사로 사는 법’이라는 것이다. 자의식과 성찰의 결속이 빚어 낸 쾌작이다.
- 조명제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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