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69. 경험이라는 스승
중앙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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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5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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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첫 학교에서 만난 체육 선생님은 나보다 몇 살 위의 연배였는데 연신 좀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나를 유혹했다. 그 선배의 지속적인 설득 끝에 학교가 끝난 후 잠실의 한 아파트 상가 2층을 찾아갔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서 무슨 강연을 듣는 장소였다. 이쯤 되니 느낌이 오실 것이다. 그 선배 교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유명한 다단계 모임이었다. ‘미국의 길’이라는 뜻을 가진 회사로 기억한다. 순간 선배에 대한 실망스러움과 우려가 일어났다. ‘고작 이런 곳에 데리고 오다니…’하는 생각과 ‘만일 여기에 넘어가면 어떡하지’하는 걱정. 그런데 묘하게 다음과 같은 호기심과 오기도 일어났다. ‘과연 이들이 주장하는 이론의 논리적 모순이 무엇일까? 온 김에 내가 반드시 찾아내겠어!’ 하는 마음 말이다. 그리곤 약 두 시간 정도의 강연이 끝났다.
나는 멍하니 넋을 잃었다. 강연 도중 아무리 찾아내려고 애를 써도 그들의 주장에 어떤 논리적 흠결을 찾아낼 수 없었다. ‘저렇게 완벽할 수가!’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론에는 모순이 없었다. 적어도 이론적으론 그랬다. 게다가 가슴 한구석에 있던 일말의 불안도 덜어주는 제안이 있었다. ‘어차피 못 팔면 자기가 쓰면 되는 생필품’이라는 주장. 실제로 그 당시에 그들의 제품이 품질은 좋다고 평가를 받았더랬다. 강연이 끝나고 밖에 나오자 대여섯 명씩 원을 그리고 서서 그간의 성과들을 각자 간증하고 향후 결의를 다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신참 대우해 주며 환영해 주었다. 마음이 허하면 기대고 싶은 따뜻한 관심이었다. 흡사 어떤 종교의 분위기와 유사한 감정을 느꼈다. 그렇다. 형식적으론 충분히 종교 집회의 모습을 한 강연회였다. 나는 새로운 믿음을 얻기 시작한 신입 회원이고 드디어 그들과 같은 뜻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돈을 버는 확실한 이론과 원리를 터득했어! 드디어 나도 부우자가 되는 거야!’
하지만 겁이 많은 나는 그다음 모임에 가는 걸 일단 자제했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논리에 혹했지만 천성이 뭘 할 때 느려터지기에 아무리 관심이 생겨도 일단 보류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만일, 돈을 벌 수 있는 진짜 기회가 와도 놓칠 가능성이 높은 게 나 같은 부류겠다 싶다. 한참을 고민했다. 저렇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데 어떻게 패가망신했다는 사람들이 많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이론일까, 사람일까? 그리곤 문득 한 신문사 사이트에 시선이 멈췄다. 바로 다단계 피해자 사례를 담은 배너를 보았던 것이다. 평소에 지나쳤던 그곳을 빠르게 클릭한 후 나는 비로소 수많은 피해자들의 생생한 후기를 볼 수 있었다. 잠시 진공상태에 멈춰 버린 순간이었다. ‘아! 이론과 논리가 현실이 되는 길은 이렇게 멀구나’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계획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그 주장이 현실에선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낱낱이 드러나는 사례들이었다. 그리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학교에선, 수업이 시작돼도 교무실에서 전화통을 붙들고 운동장에 나오지 않았던 그 선배의 안타까운 모습에서 신문 사이트의 후기들이 현실화한 모습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훗날 그 선배는 결국 교직을 떠났다. 물론 성공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부모 상담 주간이 한창이다. 10월 중순이니 고입을 앞둔 3학년 부모님과 이제 한 학년이 저무는 불안감에 다른 학년 부모님들의 문의가 폭주한다. 수많은 질문의 공통 맥락은 ‘과연 어느 고등학교에 가야 우리 애에게 좋을까요?’이다. 나는 고등학교에 관한 정보들을 찾아보고 그 중 핵심적인 사항들을 알려드린다. 아이의 성적과 표준화 검사를 통한 특성들을 두루 보고 원하는 고등학교에 적합 유무를 설명한다. 그러나 내가 알려드리는 정보는 현실에 발을 딛고 한 경험과는 거리가 먼 머릿속 세계일 뿐이다. 한 어머님의 근심을 듣는다. 아이가 친구 관계에 서툴고 그림을 좋아해서 거리가 좀 멀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디자인 특성화고를 생각한 게 있는데 어떻겠냐는 질문이다. 특성화고 아이들이 다소 험하고 안 좋다는 평판을 들어 걱정된다고 했다. 나는 일단 학교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님은 토요일에 학교 설명회가 있다고 했고 나는 그 설명회에 참석하는 것과 함께 가급적 평일에 학교를 재차 방문해 보길 권했다. 선생님을 만나 상담하는 것을 포함한 더욱 중요한 목적은 그 학교의 아이들을 살펴보기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모습과 하교 후 학교 근처에 나와 있는 모습을 체크하면 불안이 가시지 않을까 싶어 내린 제안이었다. 어머님은 그 사소한 팁에 좋아하셨다. 아마도 실천에 옮기실 거란 확신이 든다.
그러나 저런 내 제안도 어찌 되었든 머릿속에서 비롯된 예상일 뿐이다. 만일 어머님이 평일에 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을 확인한다 해도 그 학교 아이들의 특성을 온전히 파악하실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반대로 현장에서 직접 학생들을 보고 기대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부딪혀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이론과 논리, 그리고 수많은 분석들이 현실에서 예상대로 되기에 얼마나 다양한 변수를 만나야 할지 생각해 본다. 경험보다 위대한 스승은 없다고, 짐짓 아는 체할 땐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한편으론 어떤 확신도 뚜렷이 제시할 수 없기에 내담한 학부모님께 아쉬움만 더해드린 느낌이라 죄송할 때가 있다. 다행스러운 건 그것을 대부분의 학부모님도 공감해 주고 계시다는 점이다. 문득 상담은 그저 공감하는 순간의 공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 역시나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완벽한 상담과 몸으로 경험한 상담의 다른 모습이다.
고입 상담은 대입에 관한 고민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학부모님들은 변화하는 대학 입시의 흐름에 관심이 많다. 향후 바뀔 제도가 특목‧자사고 등에 유리하다는데 그렇다면 자녀도 그 학교에 가야 하는지 궁금한 식이다. 현 중3 학생부터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되고 그들이 고3 때 겪을 2028 대입은 통합 수능 방식으로 바뀐다. 내신 5등급제가 시행되며 일부 융합선택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 상대평가가 실시된다. 그래서 이런 변화에서 학생별로 어떤 고등학교에 가야 대학에 가는 게 유리할지 따져본다. 말은 진로‧진학 상담이지만 무게 추는 언제나 진학에 기울어져 있는 우리네 현실이다. 만일 온전히 대학의 평준화를 이룬 나라가 있다면, 그래서 입학보다는 졸업이 어렵고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사를 해소해 줄 수 있거나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진학하는 풍토가 자리를 잡는 나라라면, 이 시기에 학부모 상담은 어떤 내용일지 상상해 본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결말은 아이의 특성과 성향에 적합한 고등학교를 고민하는 진정한 진로 상담의 모습일 것이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어디에 관심이 큰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학교들을 조사할 것이다. 그래서 특성화고나 특목고에 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질 것이고 오히려 일부 특성화고는 일반고보다 높은 관심을 얻을 것이다. 먼 훗날의 대학 졸업과 성공보다는 지금 아이의 모습에 집중할 상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입시 제도의 유불리가 아니라 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상담이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엄연히 머릿속 예상일 뿐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저런 예상이 다이내믹 코리아에 오면 어떻게 될지는 겪어봐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교육 개혁의 시도가 현실에서는 결국 왜곡되고 좌절되어 우리나라에선 그것들이 모두 탱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머릿속에서 꿈꾸는 희망이 없이는 온전한 노력과 열정도 어려울 것이란 생각을 한다. 다만 우리가 이상(理想)을 추구함에 있어선 지나온 시절의 경험이라는 토대에 튼튼한 뿌리를 딛고 나아가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경험은 생각을 돕고, 생각은 경험을 이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이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이론과 사고가 없으면 온전하지 않다는 주장이 그래서 이미 칸트로부터 나왔나 보다. “내용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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