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65.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9.27 07:34 의견 3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더운 여름이 지났다. 우리나라의 여름은 덥고 습하다. 따라서 기온과 습도를 이용해서 만든 수치인 불쾌지수가 높다. 쉽게 말해 끈적거려 짜증이 나는 계절. 우리나라를 사계절이 뚜렷하고 물이 맑으며 산해진미가 풍부한 지상 천국으로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해외여행이 흔해지며 전 세계에 우리나라보다 좋은 기후와 살기에 쾌적한 나라들이 많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한 이들이 많다. 더워도 건조해서 일명 뽀송뽀송한 여름을 경험하고 싶다면 지중해성 기후의 나라들에 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일대는 정반대다. 1902년 코넬 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배운 엔지니어 윌리스 캐리어가 최초의 전기식 에어컨을 만든 이래로 이 지역은 비로소 쾌적한 여름을 선사 받았고 개중 일부 지역은 관광의 명소로 성장한다. 본격적으로 에어컨과 보일러가 보급된 이후 잠시 망각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극한의 더위와 추위를 품은 나라이고 그 사이에 봄, 가을이 비교적 선명해서 잠시나마 쾌적한 시기가 있는 지역이다. 만만치 않은 날씨에 관한 투정은 두 가지 양상을 띠는데 심하게 추운 겨울에는 으레 ‘더럽게’를 붙여 추위를 표현하는 반면, 극심한 여름의 ‘끈끈함’은 우리네 정(情)에 비유하며 긍정의 의미로 승화시켰다. 게다가 사계절이 분명해서 계절별로 옷들을 마련하다 보니 유독 큰 옷장이 필요한 점도 불편 꺼리다.

이런 기후의 영향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인정받을까? 일단 뛰어난 상황 파악과 적응력이 요구된다. 뚜렷한 계절 변화에 맞추어 일을 신속히 처리해야 하며 음식의 보관이나 주거의 관리가 더 정성스러워야 한다. 괜히 우리나라의 제품들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게 아니다. 핀란드와 같은 혹한의 기후에서나 이집트 사막 지대와 같은 혹서의 기후에서 모두 원활히 작동하는 K9 자주포와 같은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저력도 그래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 전천후 무기들로 어느덧 ‘K-방산’이란 명칭까지 얻어냈다. 여름인데도 뜨거운 탕이 식을까 봐 뚝배기에 담아 밥을 말아 먹는 ‘온반’의 문화부터 추운 겨울에 메밀로 면을 만들어 찬 동치미 국물에 말아 냉면을 먹는 극단의 식문화까지 독특하다. 더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이든 빠르고, 확실하며, 깔끔하다 못해 쌈빡하고 압도적인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례로 고도의 신속함을 자랑하는 의료 서비스가 있다. 건강 검진 때마다 느끼지만 빠른 예약과 다양하고 정확한 검진, 그리고 이어지는 검사 결과 확인 등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특별한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장점이다. 최근의 의료 대란으로 가장 크게 느끼는 불안은 그런 서비스를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저런 성향들은 분명 역동적인 사회를 만드는 장점일 수 있지만 어딜 가나 눈치껏 행동해야 인정을 받고 행여나 지체하거나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우둔하고 미련스럽게 여겨지기에 구성원들에게 긴장을 야기하기 쉽다. 그런 긴장은 숙고와 여유를 잃게 만들고 이내 쏠림(Lemming Effect)과 편향(Bias)을 낳는다. 거기에 극단의 진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지난 일을 쉽게 잊는다. 1997년 IMF 구제 금융 시기를 지나 어느덧 2002년에는 서울대학교 이공계열 학과의 미달 사태가 일어나는 등 극심한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사회가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 단순히 이공계 우수 인재가 의과 대학 등으로 진학하는 현상 이상이었다. 수능 문‧이과 비율을 살펴보면 주로 수학 ‘나’형과 사탐을 선택하는 문과 지망 학생 비율이 2010년도 까지 무려 63.9%로 이과보다 높았었고 이런 추세는 최초로 국어, 수학에 선택과목을 넣은 ‘2015 개정교육과정 수능’을 치른 2022년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에 공영방송에서는 ‘이공계 인재 육성’과 관련한 프로그램이 있었고 대부분의 일반고에서는 문과 학급수가 이과 학급 수를 초과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과 학급이 많은 학교일수록 면학 분위기가 좋다는 인식 아래 최대한 학급수를 늘리려다 보니 내 경험에도 문과 학급에 비해 이과 학급 인원이 많게는 10명까지 적은 경우가 있었다. 윤리 교사였던 나로서는 줄곧 문과 학급 담임을 맡았었기에 상대적으로 면학 분위기가 좋고 인원이 적은 이과 학급 담임을 주로 맡는 과학 선생님이 부러웠다. 과학 선생님들이 들으면 화낼 일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구제 금융 당시에 이공계 인력들이 쉽게 해고되는 모습, 기술직에 대한 편견과 이과 공부의 어려움에 따른 부담, 아직은 몰락하지 않은 문과 졸업생들의 취업 여건 등의 이유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했다면 지금은 ‘문송한’ 시대, 바야흐로 이과 전성기이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운영으로 이과 학생들의 문과 침공이 유리한 세태가 원인이라지만 예전에도 수학 ‘나’형을 택한 이과생들이 있었고 대학에서 교차지원이 이과가 더 유리했던 점을 떠올리면 입시의 유리함보다는 취업 시장의 여건이 이런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실제로 ‘교육통계서비스 2022년 계열별 취업률’을 보면 공학계열 72.4%, 자연 계열 67.2%인 반면 인문계열은 59.9%, 사회계열은 65.8%로 나타나서 이공계 우위의 취업 현황을 알 수 있다. 의약 계열은 무려 83.1%로 독보적인 모습이다. 괜히 이쪽으로 몰리는 게 아니다. 시류에 편승하는 쏠림이 가장 강한 분야는 누가 뭐래도 입시 환경일 텐데 작년 수능 응시 인원 가운데 과학 탐구 응시 인원이 213,218명으로 사회 탐구 응시 인원 198,647명을 웃도는 수치를 보여 뚜렷한 이과 선호 현상을 입증했다. 그러나 단순히 이과 선호 현상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이공계의 우수 인재들이 의약 계열로 쏠리는 상황이 심화되는 게 문제이다. 한편으론 이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 있으니 바로 이공계 연구 인력을 양성하겠다는 취지로 설립한 영재학교와 과학 고등학교 학생들의 의대 진학이다.

의무교육 기관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영재학교와 과학 고등학교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최근에는 부쩍 해당 학교에 관해 관심이 커지는 분위기이고 특히 의대 진학의 측면에서도 문의 사항이 많아 여러 자료를 살펴보았다. 영재학교와 과학고에서는 의대 진학 시 교육비와 장학금 등의 지원금을 전액 환수하고 추천서 등의 도움을 일체 받을 수 없다고 입학 시에 다짐을 받고 심지어 교육과정상의 교과목도 일반 고등학교와 다른 체제를 운영해서 대입의 불편함이 있는데 해마다 의대 진학생 수가 증가하고 있어 설립 취지 훼손에 우려가 커지고 있다(더불어 민주당 강득구 의원실 자료, 2020~2022년 영재학교별 의약학 계열 지원자 및 합격자 현황). 우리 사회의 민첩하고 영민한 분들은 워낙 틈새의 혜택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분야의 자료들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정공법이 존중받지 못하고 꼼수나 변칙이 똑똑함으로 인정되는 분위기는 같은 맥락에서 대입 지도를 할 때에도 나에겐 부담스럽고 벅찬 부분이었다. 일단 자소서와 추천서는 없어져서 선생님의 도움이 특별히 필요하진 않고, 2023년 3월 기준 서울과학고 학생 47명이 환수한 지원금 3억 2천만 원으로 따졌을 때 1인당 약 680만 원 정도라 감내할 수 있는 벌금 액수라 여겨지면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고 보인다. 생명과학 분야에 관한 연구 동기로 입학했다가 의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면 그걸 비난할 수 있겠냐마는 애당초 의대 입학을 노리고 해당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건 학교 설립 취지를 위배하는 기만행위일 수 있다. 제발 하지 말라고 부탁하면 안 했으면 좋겠는데 쏠림과 편향이 심한 사회에서는 어떻게든 이익을 취하는 자가 인정받기에 무리한 시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걸 몰라서 놓친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서 서럽고 아쉽다. 허나 어쩌겠나, 덜 치밀하고 둔해서 겪는 허탈함인걸.

며칠 전 눈이 맑은 중학교 1학년 제자는 영재학교를 희망하면서 조심스럽게 상담 신청을 했다. 학교에 입학하는 방법을 묻는 상담인 줄 알았더니 무언가 감춘 듯하며 쭈뼛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궁금증이 커졌다. 평소 생명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고 열심히 공부 중인 제자는 만일 영재학교를 가지 않고 의대를 가면 어떻겠냐고 질문했다. 공언했던 자신의 꿈을 수정하는 모습이 못내 부끄러웠던 것이다. 나는 현재 영재학교에서도 의대에 진출하는 저 위의 자료를 보여주며 현실이 이럴진대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고 위로해 주었다. 생명과학을 공부하다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싶은 의사가 된다면 그런 변화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달래면서 기존의 꿈을 접고 의대에 가는 게 결코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라고 격려했다. 상담을 마치고 이 아이가 갖는 부끄러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니, 그런 부끄러움을 야기한 세속의 유혹이 이 어린 과학도에게 너무나 가혹한 것은 아닌지 못난 어른으로서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되뇌며 맘을 다잡았다. 의대도 좋고 자연과학도, 공대도 좋다! 그저 휩쓸리거나 치우치지만 말아다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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