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64. 성공한 쿠데타라는 미명(美名)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9.20 06:00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문화방송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 오래전에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드라마에서는 훗날 다양한 평가를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5·16 쿠데타군을 진압하지 못한 이유로 ‘어떤 상황에서도 아군끼리의 충돌은 피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전한다. 쿠데타 세력이 저지른 죄악은 민주적인 절차를 파괴한 반헌법적인 질서 유린을 행한 점과 자칫 불미스러운 상황에서 죄 없는 군인들끼리 목숨을 잃고 아울러 국민들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내가 당시에 아무런 이유를 모르고 그런 작전에 투입된 군인이라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고 분하다.

유난히 더운 한가위를 마주하면서 평소에 없었던 좌측 하복부 통증을 느꼈다. 이건 맹장염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바로 검색부터 해본다. 만일 방치하면 복막염이나 장 폐색 등의 합병증이 일어날 수 있기에 걱정했으나, 맹장과는 위치가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통증이 완화되어 근심을 덜었다. 응급실 뺑뺑이로 연휴에 특히나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어 예민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연신 폭염 주의 문자와 북한의 대남 쓰레기 문자가 날아든다. 정부는 응급실 뺑뺑이가 원래부터 있었던 현상이고 현재 관리가 잘 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주장은 명백한 ‘가짜 뉴스’라고 했다. 그래서 장마에 비가 많이 온다는, 겨울에 몹시 춥고, 여름에 몹시 덥다는, 어떨 땐 새벽잠을 깨울 정도의 친절한 안전 안내 문자가 응급실과 관련해서는 일절 없다.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면 불손하다. 그래서 안심해야겠지만 병원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어디까지 사실일지 모른다는 가치중립적 입장에서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내 불안이 잘못이다.

의사들의 세계와 역사에 관한 지식이 쌓이는 날들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국민들은 비로소 레지던트가 전공의이고 온전한 의대 교수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꼼꼼하고 정교하게 알게 되었다. 진로 교사로서는 일전에 썼던 글에서 교육적 측면에서의 허탈함을 토로했다. 이공계 재원들이 안정적이고 수입 좋은 분야의 유혹에 쉽게 소신을 저버릴 수 있다면 진로 교육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들었던 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목에 애착과 확신이 없는 선생님이 과연 있을까 싶다. 국어 선생님은 모든 행위 중에서 말하고 쓰고 공감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할 것이고, 수학 선생님은 미래 사회에도 수리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며 윤리 선생님은 도덕성이, 체육 선생님은 건강한 신체를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과한 애착으로 인한 아집과 망상이다. 진로 교사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런 애착으로 수업과 상담을 열심히 하게 만드는 동력을 삼을 순 있어도 자신이 가르친 대로 아이들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면 안 될 일이다. 진로 교육은 인생의 과정에 도움을 주면 그만일 뿐이다. 공학도를 꿈꾸던 아이들이 의사가 되는 일도 있지만 반대로 의사를 꿈꾸던 아이들이 공학도가 되는 일도 있다. 아니면 아나운서나 은행원이 될 수도 있다. 현실에서 그런 사례가 수도 없이 많으니 열린 마음으로 대하면 될 뿐이다. 의료 대란으로 얻은 깨달음이다.

의대 증원 2,000명이 어떤 이유에서 나왔는지는 정부의 홍보 자료를 통해서 확인했다. 일정 부분 인정할 내용도 있고 모호한 내용도 있었다. 의사 단체들의 반박 자료도 보았다. 역시 일정 부분 인정할 내용과 납득이 안가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그래서 현장의 상황을 액면 그대로 파악할 수단이 충분치 않다. 2000년에 의약 분업 추진 당시 의료 대란은 마침 집회에 나가려고 병원 문을 잠그던 학교 주변 성형외과 의사 선생님의 호의로 우리 반 아이의 응급 상황을 처리한 경험 때문에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의대 정원을 10% 감축한 게 지금까지 이어진 걸 최근에 알았다. 무려 25년 전이다. 그때의 감축은 분명히 의사들을 위한 회유책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의사들은 인구 감소와 의사 자연 증가분을 주장하며 의대 정원을 늘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보다는 시급한 문제가 필수 의료에 대한 수가 조정과 의료 사고에 대한 법적 보호라고 주장한다. 나는 의사 단체가 주장하는 그밖에 다양한 공공성의 근거들을 솔직히 믿을 수 없다.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땐 해당 집단의 손익 논리에 근거해서만 바라봐야 쟁점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큰 혼란의 상황에서 지지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집단이 선의니 공익이니 하는 내용을 드는 건 자신들의 주장을 보완하기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진정 그런 이유라면 사람들이 비난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은 5년 단임의 기간을 책임지는 세력이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 및 안전을 보호하는 책무를 토대로 국가의 미래와 번영을 기획하고 집행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의대 정원 증원의 필요성에 많은 국민들이 동의를 해왔던 배경에서 정부의 이번 정책은 합당한 명분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2천 명 증원의 근거도 무려 19년 동안 증원이 없는 상황에서 2035년에 추가로 필요한 의사 수인 만 오천 명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지난 4월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 가처분 항고심 심문’은 의대 학생과 전공의 등이 정부를 상대로 낸 집행정지 신청 사건이었다. 이 재판에서 요구한 2천 명에 관한 근거 자료로 정부가 제출한 회의 자료가 지난 2월 6일 열린 2024년 1차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회의록이다. 이 회의록의 전문을 살펴보니 증원 숫자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23명 중의 4명만 이견을 제시하고 통과된 사항이 나온다(‘청년의사’, 2024.05.13. 기사 : ‘회의록 전문. 2천 명 증원 보정심에선 어떤 얘기 오갔나’). 한 시간 동안 일사천리로 강행된 회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그동안 충분한 논의를 가졌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다. 회의록을 살펴보니 증원에는 전반적으로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정부가 추진하는 과정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첫째, 정부는 전공의들이 일괄 사직서를 제출하고 복귀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과연 전혀 하지 못했을지 궁금하다. 그런 예상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수련 병원의 진료 공백과 국가적 혼란이 결코 정부에게 우호적일 수 없어서 이 일을 강행하기 어려웠을 텐데 말이다. 둘째, 휴학계를 낸 의대생들이 내년에 복귀할 경우 증원된 학생이 합해져 약 7,500명이 수업을 듣는 상황에 대한 대비책은 과연 제대로 마련되었는지 의아하다. 셋째, 복귀 전공의들에게 공백 기간만큼 수련 기간을 단축해 준다는 제안은 과연 의사 양성 과정에 충분한 이해를 근거로 한 것인지 궁금하고, 넷째, 이번 추석 명절에 응급실 혼란을 막기 위해 응급실 비용 중 진료비를 높여 환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생각은 국민들의 지지를 감안하고 낸 것인지 의아하다. 그 밖에도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 있지만, 끝으로 의사들을 위해 정부가 그만하면 할 만큼 했다는 국민들의 인정을 사기 위한 노력이 어떤 게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런 궁금함과 아쉬움이 초반에는 의사들을 탓하던 국민적 여론을 결국 정부를 탓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본다.

이번엔 우리 사회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다. 의사들은 그렇게 힘들다면서 병원을 떠나고 정부를 욕하면서 이 분야의 미래가 없다고 하는데, 증원한 의대 입시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몰린다. 기자들은 언론 탄압과 시민들의 비난으로 힘들다며 고통을 호소하는데 문 닫았다는 큰 언론사는 잘 보지 못했고 언론 고시에도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변호사를 위시한 법조인들도 치열한 경쟁으로 매년 그렇게 힘들다고 하는데 오늘도 수많은 인재가 로스쿨로 몰린다. 반면 공무원들은, 9급 공무원 선발 경쟁률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악성 민원과 과로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식이 잊을 만하면 들린다. 교사들은, 선생님이 교실에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소식에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난리가 나서 처우가 나아질 것을 기대했지만 교대, 사범대 경쟁률이 줄고 입학 점수는 급락하고 있다. 이공계 연구진들은, 연구비 축소와 고용 불안정으로 인해 기회가 되면 좀 더 안정적이고 소득이 높은 분야(의치한약수)를 추구하고 해외 진출을 희망한다.

며칠 전, 오랜만에 날이 선선해져서 창문을 열고 작업을 했다. 그랬더니 마침 창문 앞 공원에서 풀을 깎는 기계가 큰 소음을 일으키며 돌아간다. 짜증이 나려다가 생각해 보니 나는 선선한 날씨에 창문을 열고 편히 앉아 무언가를 하려는 거라면 이 더운 날 누군가는 밖에서 조금만 기온이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땀 흘려 일하는 상황임을 알고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나보다 조금 더 힘든 사람의 처지를 감안하면 그에 대한 불만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승용차를 몰면서 급한 일이 없으면 버스 등은 비켜주라고 처음 운전을 배울 때 선배가 말했다. 누구나 사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먼저 배려하라는 뜻이었을 게다. 요즘 그런 운전 태도를 후배에게 권하면 꼰대 소리 듣기 딱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해 본 게 언제였나 싶다. 이번 의료 대란에서 아쉬운 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각박해진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내외산소로 불리는 필수 의료 분야에서 생명을 살리는 의사들의 감사한 노고를 어찌 폄하할 수 있겠는가? 정부 부처에서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밤낮없이 고생하는 공무원들 역시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의료 개혁이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진영을 불문하고 전 정권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수단이 좋지 못하다면 완전한 성공으로 부를 수 없을 텐데 특히나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감안한 수단이라면 그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인정받기 어려운 과정이다. 따라서 정부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미명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의사협회, 의대생, 전공의 단체, 교수협의회 등 모두가 입장이 다른 고차 방정식을 풀어낼 해법은 결국 정치력의 수준에 달려있을 것이다. 문득 내가 의사라면? 하고 감정 이입을 해본다. 여태까지 공부하고 노력하며 경쟁해서 얻은 이 지위를 감안할 때 의료 개혁은 어느 수준까지 동의가 가능할 것인가? 극한의 자기 이익이 직업윤리와 타협할 지점은 어디인가? 그걸 제시해 줄 수 있는 수준 높은 정치적 역량은 무엇일까? 질문은 끝이 없다.

이미지 출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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