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밥상머리에서 사위와 술 한잔 하는 사이에 '선생님' 들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불쑥, 평생 선생 노릇으로 연명해 온 장인을 면전에 두고, 저는 초중고 12년 동안을 학교에 다니면서 존경은커녕 좋은 선생님이라고 여길 만한 사람조차 없었다는 고백을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좀 썰렁한 틈에 장모가 슬쩍 끼어들어 손으로 내 어깨를 툭 치며 그래도 이 사람은 '비교적' 좋은 '편'에 속했던 선생이었다면서 남편의 편을 들어 준다.
사위의 고백과 장모의 변명이 오가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내 학창시절을 일별해 보았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훌륭하거나 좋은 선생님이 몇 분이나 계셨던가, 생각하는 그 짧은 찰나에도 내 기억은 아무 주저할 것이 없었다. 초중고에 대학시절 4년을 더 얹어서 16년 동안을 쭈욱 살펴보니 사위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좋은 편'에 속하는 선생님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성적은 물론이고 인성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축에 들어있었다. 훗날 동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충청도 당진 어디쯤에서 선생으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누군가가 안줏감으로 발설하자,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기들은 아귀에 든 술과 안주를 술상 위로 너나없이 동시에 일제히 내뿜고 말았다는 후일담을 그날 그 모임에 참석했던 한 녀석의 전화 음성으로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사례가 있을 만큼 선생님이란 직분은 남에게는 물론 나 자신에게조차 어색한 직업이었으나, 어쨌던 나는 그 일을 삼십 년 동안 지속했으며, 우여곡절이 전혀 없었던 바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비교적 무사히 그 과정을 마무리하고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30여 년, 누구에게 모범을 보이거나 누구를 가르쳤다기보다는 식솔들을 지키기 위해서 제 몸피에 잘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나는 무소처럼 세파를 헤쳐왔던 것이다.
비록 네 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가 있는 소위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고백하건데, 나는 일평생 독서에는 인색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우연히 <헤르만 헤세>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데미안」을 읽은 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심중(心中)에 품고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면서 용맹전진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날 이후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범상하거나 혹은 이상한 인물로 평가받는 망외의 소득을 거두고 나서, 나, 즉 <싱클레어>는 비로소 단식을 중단하였다. 「지와 사랑」을 통해 나는 또 한참 동안을 <골트문트>로 살았고,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고 나서 이번에는 다시 <한스>로 한철을 지냈다. 이 무렵의 독서를 통해서, 내가 공부에 관심이 없고 또 학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온전히 내 탓만은 아니라는 고급스러운 위로를 획득하게 되었으므로, 비록 성적이 형편없었을지라도 나는 나름대로 상당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헤세>야말로 그 시절 내 스승이었고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훌륭한 스승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20여 년 전 평론가 <임양묵>(필명 임우기)은 <문예중앙>에 「그늘론」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늘론'이란, 작품의 행간에 웅크리고 있는 무의식, 혹은 미세한 의미에 주목하는, 서양의 로고스적 비평에서 벗어난 그의 독자적 비평인데, 그 비평을 접한 후로 '그늘론'은 내 시의 주요 관심사가 된다. 그리하여 시를 쓴 후에는 비유나 상징이 적절하게 구사되어 있는가를 확인하기 전에, 내 시에 '그늘'이 깔려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임양묵 형을 처음 만나게 된 시점은 드디어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마침내 국문과에 복학한 1983년 무렵이었는데, 형은 이런저런 이유로 졸업할 시기를 훌쩍 넘긴 채 후배들이 복학하기를 기다렸다가(?) 빈 강의실에 숨어서 당시의 시대상황으로는 금서禁書에 가깝던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등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설파를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그리고 평생에 걸쳐서 '문자(책)'를 멀리하고 사는 나는 양묵이 형의 그 '음성'을 귓바퀴처럼 생긴 깔대기로 기억의 금낭(錦囊) 속에 받아 두었다가 후배들 앞에 다시 그 음성 그대로 부려놓았던 것인데, 나는 그 역할에 대해 일종의 사명감조차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아마도 그때 내 후배들은 내가 <브레히트>와 <벤야민>을 읽은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각설하면 대학시절 내 시의, 내 문학의 스승은 <임양묵>이었다는 말이다.
페이스북 친구 중에 <김미옥>이라는 분이 있는데, 책을 제법 가까이 한다는 축들조차 그분의 독서량에 대해서는 초인적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고, 글줄이나 쓰는 사람들조차 그분의 글쓰기 분량은 가히 살인적이라며 감탄을 쏟아낸다. 예전에는 선배님들의 말씀을 귀동냥함으로써 청춘의 지적(知的) 허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처럼, 요즘은 김미옥 선생의 독후감과 장편(掌篇)에서 마음의 양식을 얻고 있는 형편이니, 일면식도 없이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접촉하게 된 <김미옥>이야말로 작금의 내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도처 유상수(人生到處 有上手)'요 심지어 '반면교사(反面敎師)'도 있으니, 선생이나 스승을 굳이 제도권 교육 안에서 찾지만 않는다면, 혹은 자격증을 구비한 사람들 가운데서만 구하지 않는다면, 스승은 언제나 있고 어디에나 계시는 법이다. 배울 것은 많은데 배우려는 사람이 적으니, 지금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스승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가 아닐까?
(김상배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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