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62. 도움으로서의 직업
중앙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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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6 06:14 | 최종 수정 2024.09.06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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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준 대가로 보상을 받고 생활을 영위한다.” 언젠가 들은 직업의 의의 중 하나이다. 그 도움의 크기에 따라 보상은 커질 것이고 도움을 받은 사람의 고마운 마음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미스터 애덤 스미스가 ‘우리들이 고기를 먹는 건 푸줏간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고 역설한 이래로 일을 하며 누군가를 돕는다는 느낌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어떤 음악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보상을 받는다. 고독하고 고집 센 예술인이 누굴 돕겠다는 동기로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별로 없다. 엄연히 자선 사업의 영역이 있으니, 일을 하면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더욱 떠올리기 힘들지 모른다. 그렇지만 의도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우린 분명히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맛있는 음식의 재료를 만들어준 농부와 어부들의 도움이 그렇고, 훌륭한 자동차를 만들어 이동을 편리하게 해준 공학도들의 도움이, 편안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꾸며주는 건설 기술자들의 도움,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어준 사람들의 도움들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곧 나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수많은 도움이 그만큼의 가치만큼 대접받고 있는지는 쉽게 가늠할 수가 없다. 먹고, 입고, 기거하는 게 삶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부분이라면 그 분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가장 큰 보수를 받아야 할진대 실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현실에는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만든 사람에게 때론 엄청난 보상이 따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명품’이라 부르는 사치재가 거기에 해당한다. 선생으로서 느끼기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 역시 대가가 애매한 일 중 하나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쉽게 파악하기 힘든 분야이므로 공동체의 합의에 의존할 수밖엔 없는 대가를 받는다. 이른바 공무원들의 호봉 개념으로 볼 때 도움의 크기로 경찰과 소방관, 그리고 관공서 직원과 선생님들을 비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상담과 수업, 그리고 학교 업무를 하면서 아이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을 잊은 채 고맙다는 인사가 겉치레로 느껴진다면 아차 싶으면서 스미스 씨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안도한다. ‘스미스 씨, 이제 저도 더 이상 실체 없는 사표나 제자 사랑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러나 오늘날에도 도움이라는 가치가 절대 사라지지 않을 직업이 있다. 남녀노소, 힘 있고 가진 자나 그렇지 못한 자를 막론하고, 도움을 받으면 그 앞에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게 되는 그 일, 그것은 바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일 것이다. 이번 여름은 그들에 관한 얘기가 너무나 뜨거웠다. 그래서 직업으로서 의사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사람들은 의사라는 직업을 동경한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라면서 한 번쯤은 소망의 직업이었을 그 이름. 몸이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아무리 건조하게 떠올려도 충분히 낭만적이다. 그런 기본 값을 품고 있기에 오늘도 잊을 만하면 병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내 평생 본 의료 드라마나 영화와 소설이 몇 편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이유이다. 지고한 가치인 생명을 직접 다루는 직업이기에 얻은 영예일 것이다. 그렇기에 막중한 책임과 직업윤리를 수반하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생명을 다루는 일. 삼십여 년 전 엄마가 입원했던 큰 병원 비상계단에서 우연히 들은, 선배 의사가 후배의 정강이를 차며 외쳤던 명분도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소변 검사에서 나온 염증 수치가 높다며 나에게 지속적인 내원을 요구했던 연세 지긋한 의사는 그 옆 병원의 젊은 의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을 때 이미 의사가 아닌 돈벌레로 전락한 존재였다. 책임이 클수록 지켜야 할 것도 커진다.
의사는 이중의 기쁨을 주는 직업이다. 병을 치료해 주는 데서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도 기쁨을 준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갔더니 손님에게 ‘해드릴 음식이 없어요, 그냥 나가세요!’ 하는데도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드는 식이다. 세상에 고객에게 해줄 게 없다고 돌아가라고 하는 데 감사한 마음을 얻게 만들 직업이 의사 말고 또 있을까? 게다가 다수가 존경하고 되고 싶은 직업인데도 애써 피하고 싶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 역설의 의의가 전문직 특유의 정보 비대칭성과 맞물려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흰 가운은 종교적 성스러움과 신뢰를 떠올리게 한다. 믿음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복장이다. 그래서 의사, 약사, 실험실의 연구원 등이 입고 일하나 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다 일어났더니 왼손가락이 움직이지 않고 며칠 후 극심한 통증까지 생겨 고통스러웠다. 그때 국내 신경외과 대표 명의인 선생님을 우연히 지역의 큰 상급 병원에서 만났고 아련한 기억 속에 그분은 비록 모들뜨기의 눈동자를 하고 있어도 확신에 찬 자신감으로 어린 나의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수술을 잘 받고 그 이후 왼손은 원래의 기능을 찾았다. 뒤이어 의사라는 직업의 의미를 상기하고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살면서 이런저런 병을 치료하며 의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그 일은 너무나 가치 있고 훌륭한 일이지만 그만큼 배워야 할 것이 많고 어려운 과정이기에 선발부터 쉽지 않은 장벽이 있다. 도움의 크기만큼 많은 보상을 받기에 불안한 시대에는 더욱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어느새 기득권으로 여겨진 나머지 그것을 타파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충돌하고 있다. 급기야 대학에서 키우겠다는 의사 숫자를 지난해보다 무려 50% 증원(1,500명)해서 뽑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방의 필수 의료 인원 확보가 국가적 과제인 만큼 조금씩 의사 수를 늘려야 하지만 한 번에 너무 큰 숫자를 확정한 데에 의사들의 반발은 자명한 일이고 응급실 등 진료의 어려움과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다. 정부와 의사들의 갈등으로 애꿎게 환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아무리 의사들의 이기심을 탓하더라도 무리수를 둬가며 밀어붙이는 정부의 정책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환자의 생명이 담보되기에 그렇다. 그러는 중에 많은 의사들이 병원을 떠났다. 우리는 때로 익숙하게 누리던 것들이 사라진 상실의 한가운데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가치들을 깨닫는다. 전공의들의 엄청난 노고를 저비용으로 써왔던 큰 병원들의 행태도 그들이 사라진 지금 얼마나 심각한 모순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급하면 손쉽게 달려가서 진료비를 차등으로 지불하지 않고 순서에 따라 최고의 의료진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이의 미열에 덜컥 겁이 난 젊은 부부에게 또한 치명적 사고를 당해 촌각을 다투는 외상 환자에게 야간 진료를 보는 응급실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도 알게 되었다. 만일 여태까지 우리가 누려왔던 대한민국 의사들의 도움이라는 게 달라질 방향이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건 그들을 만나는 일이 좀 더 힘들어질 수 있게 되는 길일지 모른다. 진료비 차등 징수부터 필수 의료 분야 전문의 고갈에 이르기까지 예상을 뛰어넘는 퇴보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도움’의 의미로 대하는 직업의 가치라는 측면에서 의사들에게 걸맞은 존중과 경의가 살아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더하여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일로써 직업의 참된 의의 또한 다시 한 번 주목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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