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황희의 수다, 눈뜬 봉사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9.05 06:56 의견 0

박황희(고전연구가)

어느 모임에서 내게 강의 요청이 있었다. 강의 도중 무슨 말끝에 “그게 바로 눈뜬 봉사 꼴이 아니겠냐?”고 했더니 휴식 시간에 어떤 이가 “그거 시각 장애인 비하 발언이 아닌가요?”하고 가볍게 꼬집었다. 그럼 ‘눈뜬 소경’이나 ‘눈뜬 장님’은 어떠냐고 했더니, 그것도 모두 장애인을 비하하는 발언 같다고 하였다.

‘맹인(盲人)’이야 눈멀 맹(盲)자를 쓰는 한자 말인 줄 쉽게 알 수 있어 시비가 없었지만, ‘장님’이니 ‘봉사’니 ‘소경’이니 하는 말은 왠지 비속어 같아 시각 장애인을 얕잡아 보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마 심청전의 ‘심봉사’를 불쌍한 사람 무시하는 단어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말들은 모두 비속어나 비하 발언이 아니라 맹인의 높임말이다. 장님이라 할 때의 장은 어른 장(長)이 아니라 지팡이 ‘장(杖)’이다. 곧 ‘지팡이를 쥔 어른’이라는 뜻이다.

또한 ‘봉사(奉事)’는 조선시대 혜민서(惠民署)에서 침을 놓던 의관으로서 종8품 벼슬을 일컫는 말이고, ‘소경(少卿)’은 고려시대 종4품의 벼슬로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천문과 역일(曆日), 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관리를 말한다. 민간에서도 시각 장애인들이 의술이나 점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각장애가 선천성일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노년에 발생하였고 육신의 눈이 감기면 마음의 눈이 열린다고 믿은 까닭에 그들을 높이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해당 관직의 벼슬 이름으로 높여 부르던 존칭어였다.

옛 선비들은 즉물적 표현을 경계하였다. 매우 수사적이고 완곡한 은유 형태의 언어유희를 즐겼다. 허기가 지면 일반 평민들이야 ‘배고 고프다’라고 직접적인 소리를 하지만, 양반 계층의 사대부들은 즉물적 표현을 하지 않고 ‘시장하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시장(嘶腸)’이란 내 장에서 말 울음소리가 난다는 표현이다. 시장의 ‘시(嘶)’는 말 울음소리 날 ‘시’ 자이고, 장(腸)은 창자 ‘장’이다.

‘지난겨울’이란 말은 문자적 표현으로는 ‘과동(過冬)’이지만 대개의 선비는 은유적 표현으로 ‘객동(客冬)’이라는 말을 쓴다. 즉 ‘손님으로 왔던 겨울’이라는 뜻이다. 손님은 왔다가 떠나는 존재이니, 왔다가 떠난 지난겨울이라는 소리이다. 선비들이 일상으로 접하는 서책도 ‘안상고인(案上古人)’이라고 표현한다. 곧 책상 위의 옛사람이라는 멋스럽고 운치 있는 말이다.

우리가 요즈음 ‘꽃게’라고 불리는 대게는 꽃처럼 예쁜 색깔이어서 꽃게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등에 꼬챙이같이 생긴 두 뿔이 있어서 ‘곶해’라고 하던 것이 ‘곶게’가 되고 ‘꽃게’가 되었다. 성호사설이나 자산어보에 나오는 ‘곶해’의 한자어 식 표기는 ‘관해(串蟹)’ 또는 ‘시해(矢蟹)’이다. 관해의 ‘관(串)’은 곶, 꼬챙이, 꼬치 등을 뜻하고 ‘해(蟹)’는 게를 말한다. 시해의 ‘시(矢)’ 역시 화살촉과 같이 끝이 뾰족한 것을 의미한다.

지명 가운데도 육지가 바다를 향해 꼬챙이처럼 튀어나온 지역을 ‘곶’이라 하는데 장산곶, 호미곶, 장기곶 등이 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한편 대게의 대는 큰 대(大) 자로 오해하기 쉬운데 대게의 한자식 표현은 ‘죽해(竹蟹)’이다. 대게의 다리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접기 위해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어서 ‘대게’라 한 것이다.

이런 곶게를 조선의 선비들은 옆으로 걷는다고 하여서 ‘횡보공자(橫步公子)’, ‘횡행개사(橫行介士)’라 하였으며, 창자가 없다고 하여 ‘무장공자(無腸公子)’라 칭하였다.

김밥의 ‘김’도 한자어로는 해태(海苔) 또는 감태(甘苔)로 불렸지만 ‘해의(海衣)’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곧 ‘바다가 입는 옷’이란 소리다. 미역은 한자로 곽(藿)이지만 ‘바다의 띠’라는 의미로 ‘해대(海帶)’라고 표현하였다.

지금은 금싸라기 땅인 ‘여의도(汝矣島)’가 조선시대는 모래바람 나는 쓸모없는 땅이었다. 그래서 ‘너나 가져라’라는 뜻의 ‘너섬’, ‘너의 섬’으로 불렸다. 이 명칭의 이두식 표현이 여의도(汝矣島)이다. 인삼의 종주지로 꼽히는 금산의 월명동(月明洞)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월외리(月外里)’였다. 조선시대 순우리말로 ‘달밖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차음하여 월외리가 된 것이었는데 다시 현대식 표기로 월명동이 된 것이다.

이른바 ‘물의를 일으켰다’라고 할 때의 ‘물의(物議)’란 뭇사람의 서로 다른 비평이나 불평을 유발한다는 뜻이다. 한자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자(自)’의 반대말은 ‘타(他)’이고 ‘기(己)’의 반대말은 ‘인(人)’이다. 그러므로 자(自)와 기(己)는 자신을 나타내고 타(他)와 인(人)은 자신을 제외한 남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신을 지칭하는 말 중 ‘아(我)’의 반대말은 ‘물(物)’이다. 이때 물(物)은 나를 제외한 온갖 만물을 가리킨다. 그래서 나와 자연을 합일하여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 한다. 그러므로 ‘물의’를 빚는다는 말은 나를 제외한 모든 만물에 분분한 의론을 일으켰다는 소리가 된다.

어떤 기준에 맞는 사람이나 물건을 고를 때 ‘물색’한다는 말을 쓴다. 이때 물색의 ‘물’은 만물 ‘물(物)’이지만 ‘색’은 찾을 ‘색(索)’이 아니라 빛 ‘색(色)’이다. 그러므로 물색의 물(物)은 소 우(牛)와 털 몰(勿)이 합쳐진 말로, 물색은 소의 빛깔을 구별한다는 속뜻이 있으며, 고대국가에서 제사를 지낼 때 좋은 색깔의 소를 고른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주장은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에서 나왔다는 학설도 있다. 수레를 몰기 위해서는 힘과 색깔이 비슷한 말이 네 마리가 필요했는데 힘이 같은 말을 ‘물마(物馬)’, 빛깔이 같은 말을 ‘색마(色馬)’라고 했다. 물색(物色)은 이 물마(物馬)와 색마(色馬)의 앞 글자가 합쳐진 말로서 수레를 끄는 힘이 균등하고 색깔이 같은 좋은 말을 고르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시대 호조에서 잡비(雜費)를 물색하던 사람을 ‘잡물색(雜物色)’, 산학청에서 석물에 관한 일을 보던 사람을 ‘석물색(石物色)’, 선공감에서 철물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을 ‘철물색(鐵物色)’이라 하였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창애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인 「답창애(答蒼厓)」라는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화담(花潭) 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우시는가?”

“저는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나 되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와 길을 가다 갑자기 천지 만물이 밝게 보이고 환해져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골목길은 갈림길도 많고 대문은 서로 비슷해서 도무지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에게 집에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주겠소. 도로 그대의 눈을 감으시오. 그리하면 곧바로 그대의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20년 만에 눈이 열린 장님에게 다시 눈을 감으라니 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기적같이 열린 광명한 세상을 거부하란 말인가? 연암이 던지는 이 새로운 화두는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혼란스럽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여 내 집을 찾지 못한다면 열린 눈은 망상이 될 뿐이다.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고, 사고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사용하지 못하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주체의 자각이 없는 현상의 투시는 언제나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러나 나야말로 ‘눈뜬장님’이 아니었던가?

연암은 간명하게 일러준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을 찾으리라. 내가 본래 있던 그 자리, 미분화된 원형의 상태로 돌아가라. 보이는 눈에 현혹되지 말아라. 튼튼한 너의 발을, 듬직한 너의 지팡이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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