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52. 관대함의 가르침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6.28 06:00 의견 3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 교사)

“쓰~앰, 꿈이 없으면 어떡해요?”

‘나의 꿈 발표하기 대회’를 매년 치른다. 그리곤 학년 아이들 20% 인원에게 상을 준다. 장려상 아이들까지 하면 너무 시간이 부족하여 본선에서는 15명 안팎의 아이들만 최우수, 우수 등위를 구분하는 발표 행사를 별도로 연다. 수업 시간에는 활동지를 작성하는 예선을 치른다. 그때 나온 질문이다. 아, 행사 계획은 물론 2주 전에 공고하고 난 후이다. 올해는 유독 저런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많다. 바뀐 입시 환경에 고입부터 긴장감이 커지고 있는 실정을 감안하면 세상 탓을 할 수도 있지만 어느덧 매너리즘에 빠진 내 수업과 일상이 아이들에게 덜 매력적이기에 나오는 투정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감히, 이런 질문을!’ 같은 생각은 접어야 한다. 내가 부족해서 나오는 질문일 수 있다고 조심해야 한다.

“꿈이 없는 사람이 많죠! 그럼 미래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계획하고 그려보면 돼요. 그런 생각을 여유 있게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요.”

여기까지 해서 멈추면 선방이다. 올해는 그다음 질문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거 수행평가인가요?”

자유 학기에 성적이 나오진 않지만, 교과들은 모두 수행평가 등 소정의 평가를 한다. 정량화된 성적 산출을 안 하는 것일 뿐 가르치는데 당연히 평가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 수행평가로 뭐라도 남는 줄 안다. 아니면 생기부 과세특(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을 관리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저 질문에는 수행평가가 아니면 대충하겠다는 속내가 들어있다. 다 귀찮은 듯 내 대답은,

“응, 수행평가야!” 있지도 않은 수행평가를 한다고 다른 교과처럼 떠벌린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삐죽거리며 참여하려고 한다. 됐다 싶었다. 다음 기습 공격을 받기 전까지는.

“만일 백지 내면 어떡해요?”

“……”

‘백지…라니…’ 오랜만에 들어본다. 고등학교에서 매일 자는 아이들이 수행평가든 뭐든 이름만 쓰고 내버리는 그 활동지. 갑자기 놀람과 실망으로 화가 오른다. 그래도 아직은 중1 아이들이다. 무얼 알고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그치며 설명한다.

“백지를 내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거니까 선생님한테는 무척 실망스러운 거야. 그걸 대놓고 물어보면 안 되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본 거지? 앞으론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요옷~!”

한숨 참았더니 아이도 수긍한다. 큰 감정의 상처 없이 납득시켰다고, 나도 괜찮아한다. 됐다. 그런데 교실 저쪽에서 또 질문이 날아온다.

“선생님, 백지 내면 안 돼요?”

‘저, 녀석이…’ 이젠 조금 수위가 높아진다. 하지만 아직 화를 달랠 여지는 있다.

“만일 누군가가 너에게 ‘저 아이는 앞날이 백지 같은 애예요!’라면 기분이 어떻겠니?” 가벼운 미소로 물었기에 아이도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간신히 교실이 진정된다. 비로소 예선을 치른다.

아이들의 맹랑한 질문에 나는 관대함의 정도를 떠올려 본다. 그래봐야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의 질문이다. 지나치고 무례하게 보이는 행동에는 과민한 반응보다는 가르치면 된다. 그걸 포용할 수 있는 여유가 관대함이다. 아이들과 거의 40년 차이가 나는 중장년의 나이에 그 정도 아량이 없으면 안 된다고 다짐한다. 물론 머리에서만 머물 때가 많아서 문제지만.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일 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그 시절 선생님 가운데 최고의 관대함을 보여주셨다. 선생이 사표가 되어야 한다면, 담임 선생님은 진정 사표로서 남는 분이다. 미국에서 한 아이가 전학 왔다. 녀석은 우리 집에서 거리가 먼, 새로 형성된 깔끔한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그 녀석 집 근처는 괜히 지나칠 때마다 주눅이 들어서 가기 싫은 공간이었다. 녀석의 근사한 도시락을 힐끗 볼 때 어린 마음에 계층의 차이가 느껴졌다. 나는 애써 그 애 가까이에선 식사를 하지 않았기에 도시락의 잔상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셨다. 1학기 때는 반장도 아닌데 자꾸 심부름을 시키셨고, 발표를 할 때면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매우 기특해하셨다. 나는 당시에 빠른 2차 성징으로 웃자라서(그때 키가 거의 지금 키다) 다른 애들보다 조숙했고, 선생님이 보시기에 그런 내 모습은 다소 듬직한 느낌을 주었으리라 본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어느덧 새 반장을 뽑는 시기가 다가오자 선생님은 전폭적으로 나를 지지하는 뉘앙스를 풍기셨다. 대표적인 예가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요즘, 심재영이가 일부러 걸리고 하는 것 같아, 아마도 반장이 하기 싫은가 보지?”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그 해 2학기에 정말 반장이 하기 싫었다.

이유는 정확지 않지만 새로 온 그 아이 때문인 것 같다. 넓고 좋은 아파트에 사는 부유한 아이. 그 아이가 전학 오고 학교에 그 아이 어머님으로 보이는 분이 자주 들락거렸던 기억이 난다. 담임 선생님은 갑자기 매일 아침에 영어를 잘하는 그 아이가 진행하는 5분 영어 회화 시간을 마련했다. 내 어린 짐작에도 그건 그 아이 모친의 부탁일 것이라는 생각이 짙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아침 5분 영어를 할 때다. 그날따라 아이가 칠판에 써 놓고 읽어주었던 기본 회화 구문에 아이들이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럴 땐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는 다른 용법을 말하며 답변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지니 그 아이는 이내 지치는 듯 허탈해하며 말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그렇게 안 하구요, 이렇게 합니다!” 이제 그만 질문하라는 그 아이의 마무리 말투에 나는 무언가를 하며 고개를 들지 않은 상태에서 말했다.

“여긴, 미국이 아니야!”

국민학교에서는 교실 앞면 구석에 담임 선생님의 책상이 있다. 그때 나는 보았다. 당신의 어떤 일을 하시면서 내 목소리를 듣고 피식 웃으시는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지금 생각하니 내 발언은 당시에 연이어 터진 미문화원 방화 및 점령 사건 등으로 한참 반미 감정이 일어났던 시기에 우연히 나온 말이라 선생님의 미소를 자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미소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녀석!’하는 기특함이었다. 적어도 어린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이 느끼셨을 함의와 상관없이 까르르 웃어주었다. 미국에서 온 소년도 머리를 긁적이며 상황이 대충 종료되었다. 나와 그 아이 사이에 아쉬움은 없었다. 문제는 그 아이의 어머니였다.

며칠 뒤 그 아이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그때 아파트라는 게 어떤 곳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우리 집의 몇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 모든 게 깔끔하고 깨끗한, 그리고 새로운 물건들로 채워진 집. 그 집에서 우리 반의 일부 선택받은 아이들이 초대된, 그 아이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나는 바보같이 고심 끝에 작은 선물을 준비해 갔다. 많이 먹으라는 그 어머님의 말에 나는 이 행사가 조금 뒤에 있을 2학기 반장 선거의 사전 운동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었지만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머님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2학기 반장이 되었다. 선생님은 별말씀이 없으셨다. 축하한다고만 하셨다.

2학기 중간에 실기 평가라는 걸 봤다. 미술과 글짓기 등의 활동이 있었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아무래도 담임 선생님이 그 미국에서 온 아이에게 점수를 잘 주는 것 같다는 불평이었다. 아이의 어머님에 대한 불만은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나도 은연중에 영향을 주고 나눴을 수 있다. 아이들의 불만을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반장의 역할이라고 주제넘게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저, 선생님, 요즘 ○○이의 성적에 아이들의 불만이 많습니다…”

“……”

선생님은 분명 내 말씀에 놀라셨다. 그러나 표정으론 그 놀람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의 답변은 너무 차분했다.

“그래? 그렇다면 문제지. 얘기를 나눠야겠구나. 그럼 그런 불만 있는 아이들을 한번 적어다오”

나는 그때 미국에서 온 아이의 성적에 이의가 있는 아이들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물론 맨 마지막에는 내 이름을 빼놓지 않았다.

“알았다. 이따 종례 후에 다 같이 보자. 남아라”

그때가 40년 전이다. 한참 민주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1985년 어느 가을. 사회 전체도 폭압적인 분위기였고 학교 역시 말할 것 없었다. 나는 무슨 배짱으로 담임 선생님께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남으라는 말씀에 이제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아마 의혹을 제기한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훈계와 매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긴장하며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종례 후 교실에 나와 몇몇 친구들이 남았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묻지 않으셨다. 다만 자신이 채점하신 우리들의 미술 작품들과 글짓기 작품들을 하나씩 미국에서 온 아이의 것과 대조하며 비교해 주셨다. 그걸 함께 바라보며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큰 편견을 갖고 선생님을 원망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다들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놀라웠던 건 선생님을 오해했던 우리들의 잘못보다도 그걸 이해해 주며 차근차근 설명해서 납득하려고 애쓰신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던 우리에게 합리적이고 자상한 설득과 이해의 노력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 일깨워주었던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내 삶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경험은 그때가 시작이었다고 믿는다.

선생님은 왜 이런 의문들을 갖게 되었는지 끝으로 물으셨다. 그 분위기에 더욱 자신감을 얻었는지 나는 대표로 말했다. “이 모든 것은 ○○이의 어머님에 관한 저희들의 괜한 오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세상에, 선생님이 겨우 한 아이 어머님의 치맛바람에 놀아나 성적을 조작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겁 없는 도발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화내지 않으셨다. 그런 생각의 옳고 그름은 묻어두시면서 평가는 절대 공정했고 그걸 니들이 확인했으니 오해가 풀렸으면 됐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후엔 어땠냐고? 오히려 담임 선생님은 나를 더 인정해 주고 좋아하셨다. 아마도 당돌해 보일 수 있는 어린 제자에게 어떤 곧은 심지를 느끼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의 기대만큼 자라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리 크게 기대해 주셨기에 이만큼이나 살고 있는지 모른다.

선생님의 관대함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 옛 기억이 떠올라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는 건 아직도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과 격려가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학교에 결석해서 미처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수줍음이 많고 야윈 여학생은 별도로 치른 예선에서 고심 끝에 몇 자를 적어 냈다. 그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적은 문구로 인해 나는 꿈이 없는 아이를 어디까지 관대하게 바라보아야 할지 고뇌하고 반성했다.

“직업이 하고 싶은 것은 없지만 고민 중입니다. 그렇지만 커서 자유로운 삶을 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누구를 믿으면서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 좋겠지만 좋지 않은 행동 말고 하게 되면 더 좋아지는 행동을 하면서 삶을 살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손주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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