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선생의 진로진학 코너 51. 순수한 일 값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6.21 06:49 | 최종 수정 2024.06.21 08:42 의견 1

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고등학교 다닐 때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했다. 외국어에 제1, 제2를 붙이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는 학교에 한 분씩은 있는, 게슈타포로 불리던 독일어 선생님의 완벽한 수업 때문에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 시간이었다. 그때 아르바이트(Arbeit)가 독일어로 ‘노동·일’인 줄 처음 알았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르바이트의 영어식 명칭은 ‘part-time job’이다. 하지만 ‘단기 시간제 일’이라 부르기도 어색하니 편의상 그냥 ‘아르바이트’란 명칭을 쓰는 게 좋겠다.

아르바이트를 떠올리며 순수한 일의 ‘값’을 생각한다. 일은 솔직히 즐거운 활동은 아니다. 진로 교사로서 할 말은 아닌 듯싶지만 현실에서 즐겁고 행복한, 자아실현의 장이자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영역으로서 일은 정말 요원하다. 오늘도 달력을 보면 빨간 날이 얼마나 되는지, 재량휴업이 언제인지, 주 4일 노동은 과연 현 생애 가능할지, 방학식과 개학식은 언제인지 궁금해 하고 살펴보는 우리들을 통해 그런 생각은 더욱 공고해진다.

작가 김영하가 미셸 투르니에의 말을 빌려 소개하듯 ‘일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 알랭 드 보통은 「인생 직업」에서 전통적으로 인간이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 그는 인간의 역사에서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이 웃어넘기고 말 일이거나 괴상한 생각이었다고 말하며 과거의 인간이 만족할 만한 순간은 일할 때가 아니라 명절 축제나 자식의 결혼 등의 극히 작은 순간일 뿐이라고 밝힌다. 고대 로마에서 비즈니스를 뜻하는 단어가 ‘negotium’ 즉, ‘즐길 수 없는 활동’이라는 뜻이었음을 알면 일이 인간에게 오랜 기간 고통이었음을 무시하긴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노동은 사물에 가하는 인간 존재의 표현 방식이 아니던가! 우리가 향유하는 물질세계는 모두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기인한다.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경제학 이론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전공하지 못한 나의 부족함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던 차에 신영복 선생 같은 어른은 중학생에게 소개할 정도로 쉽게 설명한 글을 남겨서 재차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그는 「담론」에서 양복점의 비유를 통해 노동가치설을 설명한다.

“양복점에서 양복 한 벌에 100만 원이면 50만 원은 기지(옷감) 값이고 50만 원은 공전(工錢)(노임)입니다. 방직(紡織)공장에서 기지 값 50만 원은 실값 30만 원에 공전 20만 원입니다. 방적(紡績)공장에서 실값 30만 원은 양모(羊毛)값 10만 원에 공전 20만 원입니다. 목장에서 양모값 10만 원은 양(羊) 값 5만 원에 기르는 품삯 5만 원입니다. 양복 한 벌 값 100만 원은 따져보면 공전+공전+공전+품삯+양입니다. 이것이 노동가치설입니다.”

미싱 같은 기계도 만일 가격이 30만 원이라면 부속 값 20만 원과 공전(노임) 10만 원이고, 그 부속 기계를 찾아서 기계 공작소로, 그리고 다시 제철공장을 거쳐서 맨 나중에는 광산에 가는 과정으로 전개하면 결과적으로 노동+노동+노동+노동+철광석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양과 철광석은 자연입니다. 가치 생산이란 노동과 자연이 결합 된 것입니다.”라고 정리하며 노동이 어떻게 가치를 창출하는지 나같이 우둔한 사람도 깨닫게 해준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별로 즐겁지 않은 ‘일’에 가치를 부여한 게 ‘임금’일 텐데 누구를 가르친다는 일을 하면서 그 노동의 가치는 도대체 얼마인지 쑥스럽고 남사스러워 따져보길 주저하다가 그야말로 순수한 일의 ‘값’을 직관적으로 알게 해주는 분야를 떠올리게 되니, 그것이 바로 아르바이트였다.

내 생애 처음의 일 값을 받은 아르바이트는 노래방 판돌이었다. 손님이 곡 번호를 입력하면 레이저 디스크 룸에서 바로 해당 곡이 들어있는 디스크를 플레이어에 넣고 송출하는 일. 초창기 노래방이 그렇게 운영된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좁은 방에서 눈코 뜰 새 없이 판을 갈았던 그 단순한 일로 한 달 동안 당시에 15만 원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최초의 노란 봉투, 그걸 받은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영화 ‘시동’에서 방황하던 주인공이 중국집 배달 알바를 하며 처음으로 월급을 받고 사장의 ‘수고했어요’란 말을 들을 때 잠시 멈칫하는 기특한 장면처럼. 그다음 알바는 지금은 명칭도 낯선 경양식집 웨이터였다. 웨이터라니! 다시 떠올리면 웨이터의 전형과는 한참 거리가 먼 외모의 내가 차와 음식을 서빙하는 모습이 어땠을지, 오히려 그게 손님들의 관대함을 시험하게 하는 일은 아니었을지 궁금해진다. 아니면 손님들이 음식에만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아르바이트를 더 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는 짧은 기간에 양이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속칭 ‘노가다’를 하기도 했다. 아파트 공사 현장의 잡부, 또는 단독 주택 누수를 보수하는 일의 잡부 등을 해 보았다. 말이 쉽지, 젊은 몸뚱이여도 익숙지 않은 노동은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그 일은 길게 하지 못했다. 가장 오래 한 일은 모 스포츠 브랜드 매장 점원이었다. 주로 신발과 스포츠 웨어를 팔았다. 점원들과 격이 없이 친하게 지냈으며 홍대 미대를 나왔다고 하는 연세 지긋한 여사장님과도 대화가 잘 통했다. 손님 응대를 잘했고, 물건도 잘 팔았다. 한번은 퇴근을 앞두고 중년의 남성을 장시간 설득해 매장에서 가장 비싼 파카를 팔았다. 그 손님이 결제를 하며 사장님에게 ‘훌륭한 점원을 두셨군요.’라고 칭찬을 하니 그날은 사장님이 우리 집 근처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니 사장님이 답했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미스터 시~임!” 그때 잠시나마 나의 세일즈 역량을 확인하고 뿌듯했다. 하긴 그 역량이 달리 표현된 게 지금의 수업 활동이라면 크게 반박할 순 없겠다.

아르바이트만 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프리터(Freeter)족도 있다지만 그건 이웃 나라의 얘기이고 우리에겐 최저 임금의 시간당 금액이 2024년 현재 9,860원으로 아직 1만 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최저 임금 시급 1만 원 운동이 처음 등장한 게 2013년이니, 10년이 넘게 이루지 못한 꿈이다. 그 사이에 대선이 두 번 있었고, 모든 후보자들이 공약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일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들이 많다는 뜻일 테니 그 점에선 괜히 노동가치설에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사람의 일(임금)보다 돈(자본)의 가치가 더 귀한 나라이기에 그렇다는 주장을 누군가 한다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같은 생각이에요’하고 싶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 보는 건 좋은 인생 경험이라고 의미를 부여할 순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의미 부여일 뿐, 아르바이트도 일은 일이라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용돈벌이라도 돈이 필요했기에 했던 일들이다. 그래도 월급이랍시고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고, 친구들에게 술 몇 잔을 산 기억은 남아있다. 잠깐 동안 했던 중학생 과외 알바는 너무 빨리 100점을 맞게 해서 그다음엔 아이 어머니의 기대치가 실망으로 변한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그때, 깜깜한 겨울밤, 알바를 마치고 학교 기숙사로 가기 위해 몇 대 없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류장 근처 허름한 레코드 가게 젊은 사장은 야속하게도 전주가 장엄한 노래를 연신 틀어댔다. ‘그대 떠~나가도,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 노래를 들으며 추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던 젊은 시절의 나에게 격려하고 싶다. “일하느라 고생했다. 아직 모르지? 사는 게 만만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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