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철학, 노자도덕경 산책(55)
- 변화
중앙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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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2 06:18 | 최종 수정 2024.06.1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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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초등학교 입학이 또래보다 한 해 빠르고 주민등록이 한 해 늦은 탓에 남들보다 2년을 더 교직에 있게 되었지만, 한 편으로는 좋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부정적인 생각도 없지 않다. 같은 학교에 계시는 또래 중 두 분은 올 초에 정년을 맞이했고, 한 분은 8월에 정년을 맞이한다.
그분들의 소회를 나는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나의 경우를 비춰 비슷하게 추측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저런 일들은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금세 잊히고 만다. 그저 지금의 순간을 바라보면서 변화를 감지할 뿐이다.
‘변화’의 철학적 개념은 영어 ‘Impermanence’이다. ‘비영구성’, ‘일시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가 변화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비영구적이기는 하다. 즉 영원한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한자로 변화의 핵심을 표현하자면 ‘무상無常’이다. 일정한 것이 없다는 말이 곧 변화한다는 의미가 된다. 무상은 산스크리트어 ‘anitya’를 번역한 말이고(팔리어로는 ‘anicca’), ‘항상恒常’ nitya의 반대말이므로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 된다.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panta rhei (판타레이, everything flows-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간명한 언급으로 변화를 설명한다.
이러한 용어의 정의는 변화라는 사태를 관찰하는 거시적인 관점인데 변화 속에서 매일매일을 겨우 겨우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대입하면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장자』 ‘지락’에서 ‘장자’는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여 다리를 뻗고 앉아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황홀한 가운데에 섞여서 변화變化하여 기가 나타나고 기가 변화하여 형체가 이루어지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이루어졌다가 지금 또 변화해서 죽음으로 갔으니 이것은 서로 봄‧여름‧가을‧겨울이 되어서 사계절이 운행運行되는 것과 같다.
삶과 죽음을 거대한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2300년 전 ‘장자’의 관점이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무여열반無餘涅槃(죽음에 의해 이룬 완전한 열반)이나 이신해탈離身解脫(죽음에 의해 이룬 해탈)의 경지와 견줄 만하다.
그런가 하면 헤라클레이토스의 판타레이에 기초하여 "No man ever steps in the same river twice"(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는 못한다)라고 이야기했고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of Elea)는 "whatever is, is, and what is not cannot be"(무엇이든지 존재하고 또 존재하며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두 이야기는 대조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유사하기도 하다. 다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변화’ 그 자체를 말하고는 있다.
그런가 하면 도덕경(노자)의 변화는 매우 미시적인 변화, 즉 정치적 행위에 따른 사람들의 변화(37장, 57장)가 핵심이다. 즉 앞서 장자의 변화나 헤라클레이토스의 판타레이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보다는 변화의 속성이 아니라 누군가, 혹은 무엇의 변화에 의해 변화하는 대상에 집중하는 경향이다.
거대하고 동시에 미세한, 그리고 엄격한 변화 속에 있는 우리는 미처 그 변화를 파악하기도 전에 잊히고 만다.
나의 학교 생활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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