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철학, 노자도덕경 산책(52)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5.02 06:59 의견 0

김준식(진주고등학교 교사)

오늘은 노동절이다. 메이데이(May-day)는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제의 쟁취를 위한 집회를 탄압한 경찰에 대항하여 유혈 투쟁한 미국 노동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 7월, 세계 여러 나라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서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근로자의 날’이라 불린다. 근로자는 누구이며 노동자는 누구인가? 근로자란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 즉 생활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일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노동에 대한 경시가 있었던 조선시대 ‘머슴’의 현대어 정도라고 할까? 반면 노동자란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법 형식상으로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 계약을 맺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 수단 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다. 부연하자면 노동자는 노동력을 경제적 수단으로 삼으며 동시에 자본가와 동일하고 따라서 세상의 중심이며 핵심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언제나 수세에 몰린 사람들로 인식되고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실 노동자는 존중받아야 한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 대우받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합당한 처우를 요구하고 그것이 수용되지 못하면 합법적으로 인정된 노동쟁의를 할 수밖에 없다. 그 노동쟁의는 자주 싸움(투쟁)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싸움이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가진 최후의 자기표현일 수 있다. 그 싸움에 대해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善爲士者, 不武 善戰者, 不怒 善勝敵者, 不與 善用人者, 爲之下.(선위사자, 불무 선전자, 불노 선승적자, 불여 선용인자, 위지하.)” (노자 도덕경 68장)

“뛰어난 무사는 용맹하지 않고(용맹을 드러내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내지 않으며 적에게 승리하는 사람은 (직접) 맞붙지 않고 사람을 능숙히 부리는 사람은 자신을 낮춘다.”

나는 교육 노동자다. 올해로 37년째 학교에서 신성한 노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교육 활동을 하는 교사다. (4년은 빼야 한다. 교장 4년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교육 노동자로 우리는 처참한 경험이 있었다. 1989년 전교조 탄생과 함께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아직도 그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시간이 가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새로운 국면들이 나타나면서 교사들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교사 노동조합이 탄생했고 동시에 활동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투쟁은 당당해야 한다. 위 도덕경의 ‘성내다’는 뜻의 노努는 ‘신분이 낮은’ 혹은 ‘배움이 없는’ 의미의 ‘노奴’의 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두가 인정하듯 이 땅 최고의 지성 집단이 아닌가! 어떤 순간에도 당당하게 그리고 ‘노奴’의 마음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으로 모든 문제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투쟁이요, 힘 있는 싸움이다.

자칫 혼선을 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탈리아의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 ~ 1937)의 이야기를 통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람시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가진 의미를 되짚어 보면서 자본주의의 진화와 노동자에 대한 대응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그람시가 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란 계급구조가 가지는 대립적 관계를, 지배적인 권위와 경제적 풍요를 통해 지배 복종의 관계로부터 융합적, 통합적 관계로의 발전을 위한 (묵시적)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지배계급의 회유와 암묵적 동의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우리가 잘 아는 어용 노동자들의 변질이 여기서 비롯된다.) 사실 이 논리는 러시아 혁명 당시에 노동자 계급의 융합이라는 대의에 부합하기 위해 이미 그 기초로 제공된 바 있다.

그람시의 생각을 오늘날에 대입하여 본다면 이러한 정치적인 헤게모니의 장악은 경제적 종속의 관계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고 동시에 도덕적 지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산되어 지배 계급의 정신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파시킬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고 최상층에 존재하는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흠결欠缺을 보충하면서 동시에 그 위협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사전에 감지, 제거 혹은 수정함으로써(교묘한 노조 와해, 우리나라 노동조합 결성률의 지지부진-2022년 기준 전체 13.1%, 사람들의 노동 감수성…) 자본주의 생명력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표현한 변형 주의나 확장적 헤게모니의 표현이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도덕경으로 돌아가 적에게 승리하는 사람은 맞붙지 않고…는 도덕경 76장에서 “강하고 큰 것이 아래에 놓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놓인다.(강대처하强大處下, 유약처상柔弱處上)”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잘 싸우는 것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것은 더 강한 것을 불러오고, 그 강함은 또 다른 강함을 불러들인다. 끝없는 악순환이다. 강한 방식으로는 마침내 승리자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단결해야 한다. 이 땅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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