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娛樂歌樂 시 읽기】19. 윤재철, 도요새의 눈물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4.27 07:38 의견 0

내가 다시 미란다 갯벌에 도착할 때는

저물녘 황혼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알래스카를 떠나 9일의 논스톱 비행을 마치고

다시 미란다 갯벌에 도착할 때는

해변에 아무도 없는

거친 황혼이었으면 좋겠다

나를 만약에 반겨준다면

텅 빈 갯벌에 놓인 낡은 라디오에서

부즈키로 연주하는 조르바의 춤을 들려다오

노을처럼 천천히 시작하는

노을처럼 천천히 시작해서

조금씩 빨라지는

운명처럼 무의미한 것도 없지만

옭아맨 밧줄은 굵고 단단해

나는 지금 서 있을 힘조차 없이

충분히 지쳐 있지만

춤추고 싶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조르바의 춤을 추고 싶다

텅 빈 해변

밀물 들어오는 갯벌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자의 춤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의 춤을

노을처럼 천천히

그리하여 운명이 조용히

내 곁을 떠나고

갯벌이 어둠에 잠기면

다시 하늘로 올라

별 속을 걷고 싶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잡고

*미란다 갯벌: 뉴질랜드 북섬에 위치한 갯벌. 큰뒷부리도요는 매년 이곳을 떠나 우리나라 서해안을 거쳐 알래스카에 가서 새끼를 낳고, 미란다로 돌아온다.

숭고함입니다.

도요새가 도요새이기 위해서는 운명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타고 날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도요새는 뉴질랜드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알래스카에서 새끼를 낳고 다시 뉴질랜드 미란다 해변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잘하는 것이 도요새의 삶이고 지성, 불교적으로 말하면 불성(佛性)입니다. 그 삶과 지성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논스톱으로 하늘을 나는 9일 치의 에너지 이상을 가져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됩니다. 그 이상이나 이하 모두 제대로 날 수 없어 실패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 많아도 탐내지 말아야 하고 모자란다고 그냥 굶어서도 안 됩니다. 도요새에게 생과 사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의 몸과 마음이 하늘을 나는 9일간에 알맞게 되는 것입니다. 미란다 해변에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자의 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운명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의 춤”입니다. 이 상테에 불교적인 명칭을 붙이자면 해탈(解脫)이고 열반(涅槃)일 것입니다. 그것만이 “운명처럼 무의미한 것도 없지만/ 옭아맨 밧줄은 굵고 단단”한 그 운명을 넘어서는 청정한 마음이고 몸입니다. 연기적 삶을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9일간의 논스톱 비행이 끝난 갯벌에 “부즈키로 연주하는 조르바의 춤”곡이 흘러나오면 비로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도요새의 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몸과 마음이 그처럼 될 때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의 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법신(法身)의 손을 잡고’(“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잡고”) 춤추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은 “그리하여 운명이 조용히/ 내 곁을 떠나고/ 갯벌이 어둠에 잠기면/ 다시 하늘로 올라/ 별 속을 걷고 싶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잡고”라고 표현합니다.(오철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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