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쌤의 교육현장】교사의 권위와 관리자의 권위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3.11 06:37 의견 0

차승민(거창 창남초등학교 교사)

개학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언제나 그렇듯 난 일주일 동안 책 한 번 안 펴고 오로지 반 아이들과 학급 세우기를 했다. 올해는 두 반의 다른 동학년 교사들이 차쌤의 학급세우기를 보며 따라했다. 물론 따라 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급 세우기의 본질은 반의 자율성과 아이의 성장에 방점이 있음을 동학년 교사들은 느꼈다고 한다.

‘자율이 있는 평화로운 교실’

올해 창남초 6학년1반 아이들과 함께 세우려는 교실의 모습이다. 자율과 평화! 참 좋은 말이다. 자율이란 말 속에 아이들은 자유를 원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자유는 간섭을 받지 않음을 뜻했다. 자유 속에 규율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자율로 결정했다. 자율이 생겨야 평화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자율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최대한 규칙을 덜 정하는 것이다. 규칙 자체가 나쁜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규칙이 많으면 자율을 침해한다. 몸으로 겪어보면서 그 미묘한 차이를 익히고 바꾸며 세워간다. 자유를 원하는 아이에게 자유를 주면 자율로 변할까?

6학년 아이라도 쉽지 않다. 오히려 자유만 원했지 그 뒤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교사와 어른의 눈을 피하는 기술이 더 발달되어 있었다. 자율을 목표로 하더라도 그 속에 벌어지는 수업이 많은 오류와 일탈이 생기고 그 과정에는 교사와 아이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진다.

차쌤은 이것을 조율의 과정이라 부른다. 조율을 하기 위해선 교사의 권위가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권위는 절대적인 부패로 가기 쉽다. 조율의 권위를 가진 차쌤은 늘 경계한다. 그래서 아이의 자율과 교사의 권위를 위해 두가지를 잊지 않는다.

하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찾을 수 있도록 경험할 시간과 할 수 있는 공간과 실수와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두 번째는 학급의 자율을 방해하는 학교 안의 다른 규정이나 관습 혹은 문화가 없는지 살피고 없애거나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차쌤의 이런 노력은 아이들에게 의도적으로 알린다. 그럼 이 두 가지 중에 아이들은 무엇을 보며 힘을 낼까? 처음엔 시간과 공간과 기회를 주는 것에 힘을 낸다. 아이와 교실에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힘을 내는 것은 두 번째다.

금요일 5.6교시는 산책을 나갔다. 아이들은 처음 일과시간에 거창 황강 주변 산책로를 나갔다고 한다. 이걸 하기 위해 관리자와 조율하고 내부 기안을 내고, 동학년 교사와 협조하며 동선과 안전교육을 했다. 그리고 이걸 일부러 알린다.

“산책은 공짜로 가는 것이 아니다”

맑은 공기와 햇살을 맞으며 산책을 다녀온 아이들은 생기가 넘친다. 또 가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이런 활동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린다. 아이들은 조금씩 차쌤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한다. 산책시간에 조금이라도 위험한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 교실에서와 달리 불꽃 잔소리와 사자후를 내질러도 동요하지 않는다. 차쌤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선을 달리해보자. 그렇다면 관리자는 무엇으로 권위를 세워야 하는가? 교감과 교장이 되면 위치가 달라진다. 위치가 달라지면 보는 것이 달라진다. 보는 것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진다. 정보의 비대칭은 좋은 면과 나쁜 면 두가지를 가진다. 좋은 면은 평소 알지 못한 것을 알게되면서 그 자체가 권력이 된다. 정보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나쁜 면은 이것에 매몰되면 현장과 괴리가 생긴다.

이상한 점이 있다. 교장 교감은 학교에 늘 존재하는 데 학교 안에서 왜 괴리가 생긴 단 말인가? 교사의 주 활동반경은 교실이지만, 교장, 교감의 활동반경은 교무실, 교장실 그리고 행정실과 더 가깝다. 만약 교장 교감이 학교 구성원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려 한다면 학급에서 교사가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과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관리자가 권위를 가지기 위해선 역시 두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교사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해서 학급에서 교사의 자율성이 보장되기 위한 학교 내의 문화, 제도, 권한 위임 등에 촉각을 세우고 관찰해야 한다. 관찰 된 것은 관리자가 주도적으로 구성원들에게 알리고 조언과 협조를 구한다. 합의를 통해 없애거나 바꾼 것도 필연적으로 혼란이 생긴다. 이때 교감은 교사들과 조율하고, 교장은 또다른 걸림돌이 없는지 살핀다. 목적 역시 학급의 자율성 보장에 있다.

두 번째는 학교 안에서 해결 할 없는 공문과 지침과 규정과 법률적 해석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이 학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청과 교육부를 비롯한 학교 상급기관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교감협의회와 교장협의회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교사들의 불만과 목소리 중에서 학교 안에서 해결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학교를 대표해 항의하고 수정 보안을 요구하거나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

첫 번째 보다 두 번째가 더 어렵다. 그러나 두 번째 역할을 하는 교장,교감이 진정한 관리자의 역할이다. 권한이 늘어나면서 생기는 책무의 중대성은 여기에 해당한다. 교장 교감이 이걸 하는 것을 지켜보는 교사는 처음엔 반신반의한다. 이건 교실에서 자율을 주기 위해 두가지 일을 하는 차쌤도 겪는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자율이 학급내 퍼지듯, 교장 교감도 이 두가지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학교 문화가 변한다.

반대의 상황은 이렇다. 교사가 자율을 주지 않고 아이를 관리하려 하거나 교장, 교감이 교사에게 자율권을 주지 않고 관리 감독하려 할 때이다. 더욱 더 나쁜 상황은 이렇다. 교사는 관리를 더 잘하기 위해 촘촘한 규칙을 세워 아이를 옭아 매거나 교장, 교감은 상부의 지침과 규정을 근거로 더 확대 해석 혹은 보수적인 접근으로 교사를 옭아 매는 것이다. 이것의 더 안좋은 것은 규칙과 지침과 규정의 권한으로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장 최악의 상황은 이렇다. 교사는 아이를 옭아매면서 그것이 자신의 교육철학이라고 믿는 것이고, 교장, 교감은 이렇게 교사를 옭아매는 것이 자신의 교육철학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교사와 최악의 교장, 교감 중 누가 더 최악인가? 당연 교장, 교감이다. 교장, 교감은 최악의 교사를 능력있는 교사라고 우대하고, 아이에게 자율을 주는 교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학교의 문화와 교장, 교감의 이런 행태에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대해 위험하다고 여겨 경원하고 배제한다.

“이건 아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저의 경영관이자 교육철학이니 따라주세요”

교장, 교감이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교육철학을 덧붙이면 최악의 교육빌런으로 등극한다. 최소한 그 학교에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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