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호의 임진강 노래 14】평화마을짓자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4.01.31 07:16 의견 0

노자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인근에 땅을 사고 집을 지으려는 별난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하자 급관심을 표현한 사람은 뜻밖에도 아내였다. 내가 정년을 하면 아내는 파주를 떠나고 싶어 했다. 인근에 사는 딸의 육아를 늘 걱정하면서도 2, 3년씩 지방을 유랑하는 노마드 인생에 동의한 것도 파주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연고도 없는 파주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별 불만을 표시하지 않던 아내도 인생 말년에 내 실수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파주를 떠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이 일을 함께 추진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부지는 어디인지, 일이 현재 얼마만큼 진행된 것인지, 소요 자금은 얼마나 드는지, 결원이 생기면 어떻게 보충하는지 등등에 대해서 마구마구 궁금증을 유발하고 계셨다.

알아보니, 14가구가 참여하여 작고 소박한 집을 지을 목적으로 파평면 눌노리에 1,300평 정도 되는 작은 땅을 구입한 상태로,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평화마을짓자’ 회원들이었다. ‘평화마을짓자’는 2017년부터 모임을 시작하여 2020년 사단법인으로 전환한 단체이다. 윤구병 선생이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나가서 일군 ‘변산공동체’를 모델로 파주에 생태적 삶의 공동체인 ‘평화마을’을 만든다는 것이 기본 아이디어였고, 농사를 생태와 예술과 평화와 접목하고, 먹을거리 자립을 이루는 유기순환 농사를 짓고 농산품을 나누고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

2018년 3월에 변산공동체의 초창기부터 겪었던 좌충우돌 경험담과 연천군 왕징면에서 시도되었던 ‘임진강생태평화마을’의 시도와 실패담, 헤이리의 ‘쌈지어린농부학교’의 실천과 원칙들을 논의한 평화마을발표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자리에서 그동안 여기저기에서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지켜야 할 새로운 생태평화 공동체의 원칙들이 토론되고 조금씩 가닥을 잡아나갔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교사, 농부, 예술가 등 다양한 직업군의 13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한 (사)‘평화마을짓자’가 구성되었다.

(사)‘평화마을짓자’는 ‘예술로 농사짓고 농사로 평화짓자’는 기치를 내걸고 우리의 전통 토종 씨앗을 심고 기르며 경운과 비닐,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쓰지 않는 생태농업으로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에서 공동체 밭을 5년째 가꾸고 있다. 장단콩 메주로 간장 된장 발효식품 만들기, 마을 김장, 꽃차 만들기,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전통 요리, 문학 콘서트, 적정기술과 에너지자립 등 다양한 교육과 체험활동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영속적인 농법과 삶의 전환을 추구하는 퍼머컬처(permaculture) 디자인 코스를 열어 퍼머컬처리스트를 양성하고 있다. 또한 예술과 평화 활동, 민통선 탐방 등 접경지역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2022년에는 태양열과 지열을 이용한 에너지자립 온실을 만들어 쉼과 명상 등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할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가을에는 팜 파티 형식의 가을 잔치를 열어 밭을 누비고 채소구이를 먹으며 음악회와 누구나 참여하는 놀이판을 개최한다.

회원들이 많지 않았던 모임 초기에 함께 농사지으면서 마을 만들기 이야기가 우연히 나오고, 우연한 이야기에 뼈가 생기고 살이 붙어서, 2021년에 희망하는 회원 16명이 참여하는 생태마을 만들기 프로젝트가 공식화된 것이다. 다만 변산공동체처럼 공동체 공동건물에 개인 또는 가족이 입주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들이 집을 지어 여러 집들이 마을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일이 추진되었다. 처음에는 희망 회원이 유동적이었으나 마을부지를 찾는 과정에서 인원이 16명으로 확정되었다.

아내가 이 이야기에 끌린 것은 생태마을에 대한 공감이나, 이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적인 신뢰감이라기보다는, 동의하긴 했지만 노마드 인생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우리가 지방에 전전할 경우 딸과 손녀의 육아에 대한 걱정이 많이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아내는 나더러 어이없게도 혹시 회원 중에 사정의 변동이 생겨 결원이 생길 경우 우리가 참여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이교수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길은 항상 직선으로만 뻗지 않듯이 계획은 항상 의도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 잘 되는 일도 잘 안 되는 일도 ‘뜻밖에’ 이루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나이가 들다 보니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의미가 날로 새롭다. 잘 된다고, 혹은 잘 안 된다고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뼈저리게 실감하면서 산다.

출근길이 늦어 빠른 길을 찾는다고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뜻밖에 안개가 가득

숨을 몰아쉬어도 한 발 앞을 볼 수가 없고

꽃 한번 보자고 봄부터 부지런을 떨며

앞마당 가득 꽃씨를 뿌렸더니

뜻밖의 장마에 볼만한 가을꽃 하나 남지 않았네

힘든 꽃에 겨우 달린 주먹만 한 애호박 하나

남이 볼까 미끈한 살갗을 풀숲에 숨겼다가

깜짝 놀라 정신 차리고 보니 아뿔싸 이미 늙어

뜻밖에 뜻대로 되어가는 일보다

뜻과 달리 뜻밖으로 빠지는 일이 더 많으니

청춘을 아낀다고 찔끔찔끔 살지 말라

사람 사는 일이란 게

언제나 뜻과 달리 뜻밖의 일로

홀로 찬바람을 맞고 서 있는 일인지도 몰라

가는 세월에 흰머리는 뜻대로의 길이겠으나

가끔씩 뜻밖의 풍파風波를 노래하기 위해

아비의 뼈를 깎아 피리라도 불어볼까나

- 졸시, ‘뜻밖에’, 시집 <어머니는 이제 국수를 먹지 않는다>중에서

평화마을짓자 밭, 사진 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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