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을 걸으면서 내 입에선 저절로 성가를 비롯한 동요와 가요들이 흘러나왔다.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de la Calzada까지 마을과 마을로 이어지는 시골 들판 길은 산티아고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끝없이 넓게 펼쳐진 푸르른 밀 밭길이다. 창공에는 흰 뭉게구름들로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너른 들판에는 초록의 밀 물결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초록과 대조를 이루는 새빨간 양귀비들도 바람에 살랑이며 지천으로 피어있다. 천국이 따로 없다. 여기가 그리던 바로 그 천국이다. 내 입에서는 저절로 성가가 흘러나왔다. "나무에 스치는 바람 속에 성령이여, 햇살과 같이 오소서. 새 생명 주시는 성령, 불어 주옵소서. 성령의 입김, 나에게로"(가톨릭 성가 495).
에스떼야Estella에서 로스 아르꼬스Los Arcos까지 가는 길에선 어릴 적 자주 보았던 큰 미루나무를 만났다. 꿈에도 그리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정말 뛸 듯이 반가웠다. 나는 소녀처럼 팔짝팔짝 뛰며 미루나무와 재회했다. 미루나무도 수많은 잎들을 바람에 반짝이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듯했다. 참으로 기쁘고 감격스런 미루나무와의 해후였다. 입에서는 벌써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 구름이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 놓고 갔데요"가 흘러나왔다. 전체 가사를 모르니 아는 귀절만 반복해도 힘이 났다.
하얀 찔레꽃들을 보고는 장사익의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를 읊조렸고, 해당화를 보고는 이미자의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라는 가사를 흥얼거렸다. 산등선 길섶 나무들을 보면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를 불러 오랜 세월 외로이 서 있었을 나무들을 위로했고, 길을 잘못 들어선 팀을 하염없이 기다릴 때는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불신이 만연해도”(가톨릭 성가 28)를 부르며 초조함을 달랬다. 푸르고 너른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멋진 말이나 들소들을 보면 “들소들이 뛰고 노루 사슴 노는, 그곳에 나의 집 지어주, 걱정 소리 없고 구름 한 점 없는, 그곳에 나의 집 지어주, 언덕 위의 집, 노루 사슴이 뛰어놀고, 걱정 소리 하나도 들리잖고, 구름 한 점도 없는 그곳”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제목 ‘언덕 위의 집’은 고교 시절 교내합창대회를 준비하면서 수없이 불렀기에 “오, 기브 미 어 홈Oh, give me a home 원어로도 입에서 술술 나오니 신기할 따름이다.(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