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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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31 19:33 | 최종 수정 2023.12.3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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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네 채와 마을 공유건물, 막걸리 도가의 건축이 완성됐지만, 아직 빈터가 더 넓게 남아 있다. 늦게 입주한 앞집이 외부공사를 하느라 번잡했지만 공사를 마친 12월 초부터는 주변에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인근 부대에서 툭하면 쏘아대던 방공포 소리도 요즘엔 잘 들리지 않는다. 날씨가 추우면 방공포 연습도 뜸한 것일까? 빈터가 소음을 빨아들인 듯 조용한 겨울이다. 도로 옆에 폭이 좁은 개울이 있는데 개울 건너편 집의 바지런한 부부의 모습도 보기 어렵다. 여름내 새벽부터 밭에 붙어있는 모습을 창 너머로 보았는데 텃밭에는 마늘인지 양파인지 푸릇푸릇한 것이 멀칭 비닐을 뚫고 나와 있다. 아주머니는 옹벽에 걸쳐 놓은 높다란 사다리를 타고 개울로 내려가서 빨래를 하는데 그 리드미컬한 빨래 방망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가끔 흰색왜가리 한 마리가 빨래터에서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고, 긴 날개를 펴고 나직이 비행할 뿐이다. 동이 트자마자 개울 옆 도로를 지나 위쪽 밭으로 가는 탈탈탈탈 이웃들의 경운기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조용한 겨울이다.
조용한 겨울에도 들리는 소리도 있다. 임진강을 지척에 둔 곳이라 그런지 엄청난 기러기 떼들이 마을 하늘길을 지나 출퇴근한다. 셀 수 없을 만큼의 기러기들이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으며 내는 소리는 몇 초에 불과하지만 엄청나다. 나는 기러기의 낌새가 느껴지면 거실 창을 열고 툇마루에서 하늘을 우러른다. 왜인지 모르지만 나에게 기러기는 쓸쓸함이 각인되어 있는 새다. 철새라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본다. 그 유명한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 리’로 시작되는 노래는 박목월의 시 ‘이별의 노래’에 곡을 붙인 것이고, 유배 길에 쓴 정약용의 시 경안(驚雁) 역시 헤어짐에 대한 내용이다. 형제가 나란히 유배길에 오르고 동작 나루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면 내일은 서로 다른 유배지로 떠나야 하는 처지에 빗대어 쓴 것이어서 쓸쓸함이 그지없다. 나는 작년 이맘때 건축 현장에서 엄청난 기러기 떼들을 처음 보았는데 건축이 완성된 집에 살면서 다시 만났다. 그래서일까? 내게 기러기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반가운 새로 덧입혀졌다. 낮에 둑방 길을 산책하다 보면 인근 논밭에 족히 수백 마리는 넘을 듯한 기러기들의 모이 활동 목격할 수 있다. 반가움이 덧입혀진 기러기들이 벼 그루터기만 남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는 모습은 내게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이게 한다. 우리 집 수탉의 목청 돋우는 소리도 이 겨울에 듣는다. 암평아리겠거니 했던 병아리가 수탉 자태를 드러냈다. 병아리 때부터 유독 잘 싸우던 두 마리가 모두 수탉이다. 먹이 가지고 싸우는 줄 알았는데 쌈박질의 이유가 따로 있었던 듯하다. 급기야 서로 질세라 아침나절 돌아가며 울어 젖힌다. 우리 집 처마 끝의 풍경 울음과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나는 이 적막함 속에서 운 좋게 때때로 백색소음을 마주한다. 흔히 북유럽사람들이 여유롭고 배려가 넘치는 힘을 갖는 이유를 어느 책에서는 그들이 삶을 디자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숲을 혼자 걷거나 호수나 바다를 혼자 응시하거나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그저 혼자서 가만히 응시한다. 자연과 자신만의 1:1의 상황으로 자신을 노출시킨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을 그들은 깨닫는 듯하다. 고요함을 대면할 수 있는 사람들, 그 중요함을 아는 사람들의 눈과 표현은 장식의 허세를 피할 줄 안다’(『디자이너 마인드』-김윤미 저/ 핀란드 디자이너 45인의 디자인 철학과 삶을 대하는 자세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같이 일정한 스펙트럼을 가진 거부감이 없는 소음을 백색소음이라 한다. 추워지니 집안에서 적막함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앞집 박공지붕 위로 밤새 내린 서리가 투명하고 얇은 비단처럼 붙어있다. 햇볕에 스멀스멀 아지랑이가 되어 하늘로 피어오른다. 봄날 들판에서만 피어나는 줄 알았던 아지랑이가 겨울, 박공지붕 위에서도 피어오른다.(글 김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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