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개인 생활과는 달리 지역의 시민단체 상황은 매우 미묘하게 꼬여가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원래 이 지역이 군사접경지역이다 보니 주민들의 성향이 매우 보수적이어서 이렇다 할 시민단체 활동이 없었다. 20여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전교조 공립중등교사는 나 혼자뿐이어서 우리 교장이 지역 교장회의에 가면 다른 학교 교장들이 내 근황을 물어볼 정도였다. 진보적인 시민단체는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도시가 커지면서 환경단체도 만들어지고 농민단체와 학부모 단체도 만들어지고, 나중에 혁신교육이 자리 잡으면서 혁신교육학부모연대 같은 교육단체도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부문 단체가 아니라 전체 시민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지역 참여연대가 꾸려지고, 이 단체가 ‘민주시민교육센터’를 위탁 운영하게 된 것은 우리 지역에서 보면 매우 획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와 시의 조례에 따라 만들어진 민주시민교육센터는 파주시가 최초여서 다른 시군으로의 파급 효과도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다. 당시에 지역신문에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 최근에 우리나라는 민주시민교육센터를 설립하여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체계적으로 민주시민교육을 실시하려는 지방자치단체가 늘고 있다. 경기도는 19개 지자체가 민주시민교육조례를 제정하였고, 전국 226개의 기초지자체 중에서 파주시가 최초로 민주시민교육센터를 운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2018년 ‘파주시 민주시민 교육조례’(이하 조례)를 제정하고, 2019년 「파주시 민주시민교육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하여 파주 시민을 대상으로 민주시민교육의 구체적인 내용과 범위, 방법을 탐구하였고, 2020년 3월, 시민단체 「파주시민참여연대」에 위탁하여 「파주시 민주시민교육센터」를 운영하게 되었다. 조례에서 밝힌 민주시민교육의 기본원칙(제3조)은 다음과 같다. ① 민주시민교육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활동으로 시민이 지녀야 할 권리와 책임의식을 함양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 ② 민주시민교육은 시민의 건강한 사회생활 영위와 민주적 의식과 역량을 학습하기 위한 공익적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③ 민주시민교육에서는 학문 분야나 정치 현실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이론 및 관점과 의견들이 공정하고 다양하게 다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 ④ 민주시민교육은 참가자들에게 특정 의견만을 갖도록 설득하거나 사적인 이해관계나 특정 정파의 의견 관철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⑤ 모든 시민이 민주시민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 접근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시민들은 민주시민교육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파주시 민주시민교육센터」는 ① 민주주의 ② 자율 ③ 연대 ④ 공정성 ⑤ 현장성을 핵심가치로 삼고 사업계획으로 첫째, 주민자치 역량강화, 둘째, 학교 민주시민교육 지원, 셋째, 민주시민교육 네트워크 강화 넷째, 평화학교 운영을 대주제로 잡고 세부적인 실천 계획을 잡고 있다. 파주 지역은 민족 분단의 모순과 적대감으로 오랫동안 수구적인 정치와 보수적인 정치문화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민주시민교육을 한다고 하면 아마도 색깔의 프리즘으로 곁눈질부터 할 것이다. 따라서 해야 할 일은 많고,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며, 함께 할 사람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발목을 잡는 것들은 산더미 같을 것이다. 신도시 조성으로 인한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교육, 경험, 사고와 이해관계의 차이도 존재한다. 센터 운영위원회가 예전 같으면 접점을 찾기 어려운 단체의 대표들로 꾸려진 것을 보면 지역의 현실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당장의 갈등 회피가 아니라, 대립적인 시각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운영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제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합의 과정으로 이끌어 센터가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할 일들을 학교, 생활영역, 시민사회, 공공영역 등으로 구분하여 시간별로 단기, 장기과제로 분류하고, 문제의 심각성에 따라 단계별로 사업을 추진하는 지혜와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길지는 않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지역의 자생적인 마을공동체, 교육단체, 환경단체, 여성단체, 시민단체가 노력했던 민주주의 교육경험들을 공유하고, 이어서 승화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 「파주시 민주시민교육센터」가 지역 내 민주주의 자원연결망으로서 독일의 시민대학과 같은 지역 민주주의 발전소로 충분하게 기능하기를, 나아가 파주 센터를 중심으로 경기도 관내·외 민주시민교육 네트워크가 활짝 꽃피우기를 빈다.”
그러면서 파주민주시민교육센터가 미국의 시민교육센터(CCE, Center for Civic Education)나 독일의 시민대학(Volkshochschule) 같은 역할을 수행해 주기를 주문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센터가 출범하자마자 운영의 문제를 둘러싸고 단체 내부에서 잡음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단체가 분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행부도 만나보고 비대위쪽 대표도 만났다.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달랐다. 한쪽은 채용한 직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다른 쪽은 대표의 권위주의와 성인지감수성을 지적했다. 타협과 절충을 바라고 양쪽을 만났으나 해결은 난망한 상태였다. 양쪽 모두 지나침이 있었고, 나름대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보았으나 개인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대위쪽이 시청 앞에서 장외집회를 하고 시끄러워지자 야심찬 계획으로 시민교육센터를 출범시킨 시장은 결국 센터의 위탁운영을 취소했다. 고소, 고발, 소송이 이어졌다. 용두사미. 시작은 창대했지만 나중은 취졸했다. 예상했던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내부의 분열로 망한 것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의 새로운 담대한 시도는 이렇게 해서 좌절되었다.
남아 있던 회원들 몇몇이 모여 정체된 남북관계를 개선을 요구하는 ‘종전선언촉구행진’을 하기로 했다, 한 달에 한 번. 모일 수 있는 사람끼리 평화누리길을 걷는 것이었다. 회원들끼리 평화누리길 7코스와 8코스를 세 번에 걸쳐 걸었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임진각에서 장산 전망대까지 8코스의 남은 길을 걸었다. 해설을 하기로 한 안내자가 코로나에 걸려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장산 전망대에서의 설명은 내가 대신했다. 시 한 편을 낭송했다. 대타가 일타강사가 된다더니 임진강평화기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단체의 활동은 여기서 끝났다. 모두가 분열에는 용감했고, 해결에는 취약했다. 지역사회의 분열은 이후 도지사, 교육감을 뽑는 지방선거에서 후유증이 그대로 드러났다. 남북의 평화 모드 또한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이제 전쟁을 끝내라
강 건너 이쪽저쪽은 들으라
칠십 년 넘게 끝내지 못한 전쟁
누구도 살리지 못하고
아무도 편케 죽지 못하는
돌아갈 수도 돌아올 수도 없어
무너진 강둑을 다시 쌓지 못하는
부질없는 전쟁은 끝났다 선언하라
이제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위해
철조망과 지뢰와 겨누던 무기를 거두라
임진강에 다시 배를 띄우고
끊어졌던 길을 다시 잇고
전하지 못한 편지를 다시 부치고
철마는 기적을 울리며 다시 달리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라
푸른 하늘에는 경계가 없고
바람을 타는 새는 휴전선이 없듯
개성 지나고 평양 거쳐 신의주까지
압록강 건너 만주에서 바이칼까지
우리 가는 길에 막힘이 없게 하라
분단과 이산의 속울음을 삼키며
쏟아지는 물길을 힘껏 거슬러
종전을 촉구하며 걷는 사람들
점점 소금 행진의 물결이 되어가고 있다
- 임진강 10, 종전선언촉구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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