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대학교 교수
5-2. 아기와 養神
<장자> 「경상초」의 앞부분은 <노자>에서 보이는 ‘선섭생’의 방법을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 이 부분에서는 노자가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노자와 그의 제자인 경상초, 경상초와 그의 제자인 남영주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부분의 내용은 경상초와 같이 되고자 한, 남영주가 스승의 권고를 받아 노자를 만나러 가서, 노자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다.
특히 노자와 남영주와의 대화에서는 아기의 메타포가 갖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아기가 양신養神의 방법을 가장 잘 체득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기는 심재와 좌망, 상아 등의 포신抱神 방법을 자신에게 수렴하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단지 「경상초」와 <노자>의 차이점은 ‘적저赤子’로 서술된 아기가 ‘아자兒子’로 서술되고 있는 점이다. 긴 인용문이지만 옮겨 보자.
老子가 말했다. “‘생명을 지키는 방법’[衛生之經]은 다음과 같다. 능히 하나를 끌어안아[抱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 능히 자유로울[翛然] 수 있는가? 능히 무지할[侗然] 수 있는가? 능히 아기처럼 될 수 있는가? 아기가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화기和氣가 지극하기[和之至] 때문이고,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쥐가 나지 않는 것은 그 생명력을 간직하기[共其德] 때문이고, 종일 보아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은 의식이 밖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도 어딜 가는지 모르고 머물러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며, 대상에 순응하여 함께 흘러간다. 이것이 생명을 지키는 방법이다” (남영주가 물었다) “지인至人의 덕德입니까?” (노자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이것은 소위 얼음이 녹은 것에 불과하다. …… 이것을 생명을 지키는 방법[衛生之經]이라 한다.” (남영주가 다시 물었다) “이것이 지극한 것입니까?” (노자가 다시 대답하였다) “… 내가 ‘아기처럼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기는 움직여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가도 어딜 가는지 모르며, 몸은 마른 나무 가지 같고 마음을 식은 재와 같다. 이와 같으면 화도 이르지 않고 복도 오지 않는다. 화복이 없으니 어찌 인간이 초래한 재난이 있겠는가?”
이 인용문의 결론은 아기처럼 되어야만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인용문의 내용들을 음미해 보자. 우선 첫 구절의, 생명을 지키는 방법’[衛生之經]이라는 구절의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위생지경衛生之經”이 글자 그대로 삶을 지키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노자> 50장의 “선섭생”의 의미가 아닐까?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맹수나 전쟁에서도 그 목숨을 지켰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인 ‘하나를 끌어안아[抱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문장은 <노자>10장의 경문 즉, “載營魄抱一, 能無離乎.”를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문 속의 문장 “能抱一乎, 能勿失乎”에서 뒷 구절은 <노자> 10장의 “무리無離”를 “물실勿失”로 바꾸고 있는 듯하다. 인용문의 이 구절은 <노자> 10장을 변용한 것으로 이해하였기에, 곽경번의 <장자집석>에서는 곽상의 주석인 “불리기성不離其性”을 가져오고, 성현영의 소疎인 “수진불이야守眞不二也”라는 문장을 달고 있다. 곽상과 성현영의 주석과 소의 내용은 <노자>50장의 “苟不以求離其本, 不以欲渝其眞”이라는 경문을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두 학자는 <노자>50장 경문의 ‘기본其本’과 ‘기진其眞’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아기”,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쥐가 나지 않는 아기”는 <노자>55장의 경문(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全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과 겹쳐 보인다. <노자>55장이 말하는 핵심 요지가 “정지지精之至와 화지지和之至”인데, 이 인용문에서 요지도 동일하다.
이러한 이해가 옳다면, 우리는 <장자> 「경상초」편에서도 <노자> 50장과 55장을 다시 만난 것이다. 「달생」편뿐만 아니라, 「경상초」편에서도 적자赤子 메타포를 부연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아기의 ‘시선’을 새로이 추가하고 있다. 아기가 “종일 보아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은, 태어난 지 6주 이후가 되어야 외부 불빛에 반응하는 아기의 시선일 수 있다. 물론 아기는 태어난 지 6주 이후에도 시선에 따라 정신이 집중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의식에 따라 시선이 움직이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의식이 밖에 있지 않다”라는 것은 신경심리학에서 말하는 ‘시선’이 형성되기 이전을 의미하거나, 이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문학적 수사인 ‘영혼이 탄생하기 이전의 시기’에 해당할 것이다.
아기는 무심하거나 무신경하기에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상황에 맡겨 흘러갈 뿐이다. 이러한 아기의 상태를 인용문에서는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상태와 같다고 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은 물의 본래 상태를 회복(復歸其根)하는 것일 터이다. 이 내용은 “근본으로 되돌아감을 고요함이라고 하고, 이것을 제 명에 돌아간다고 한다. 제 명에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고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라는 <노자>16장이다. 또한 <노자> 55장의 내용이기도 하다. <노자>55장에서 “조화를 아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고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知和曰常, 知常曰明)”이라고 한 내용과 같다. 결국 이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아기와 관련된 내용은 <노자>에서 등장한 아기의 메타포를 모두 가져 온 것이다.
아기가 생명을 지키는 법을 가장 잘 안다면, <장자>에서 말한 생명을 손상하는 일들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장자>에서 생명을 손상하는 일들이란, 외부적 사물에 마음이 꺼달려 감각에 얽매이거나 감정이 발생하거나, 의식이 외부로 치달리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과 감정, 의식을 내부로 수렴하여 단절해 내는 방법들이 심재, 좌망, 상아의 방법들이었다.
아기가 생명을 잘 지켜낸다면, 이러한 방법들을 의도하지 않고도 체득하고 있어야 한다. 이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은 아기가 이러한 방법을 체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기는 움직여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가도 어딜 가는지 모르며, 몸은 마른 나무 가지 같고 마음을 식은 재와 같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몸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식은 재와 같다”라는 것은 ‘상아喪我’의 방법이었다. ‘마른 나무와 같은 몸’은 외부적 사물에 의해 감각이나 감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식은 재와 같은 마음’은 고요한 상태이기에 외부적 감각이나 감정, 상황에 의해 침해받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