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도를 정의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여전히 노자의 도는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노자에서 도는 실체처럼 읽히기도 하고, 법칙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노자의 도를 실체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법칙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이 도를 실체나 법칙으로 해석하는 것은 도와 연동되는 언설에서 ‘생(生)’과 ‘운동(動)’라는 글자 때문이다.

도가 생성하거나[道生之], 도가 운동한다[道之動]라는 표현이 도를 실체로 보거나 법칙으로 보게 만든다. 하지만 ‘생’이라는 글자만 하더라도 그 뜻이 20여개가 넘고, 주체의 의미로 번역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동양의 사유에 실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도의 운동이라는 것도 필연적이거나 보편적인 의미에서 규칙이라는 의미의 법칙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번역하고 이해한 것은 서양 학문의 영향을 받아 그 시각으로 노자를 읽었기 때문이다.

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도를 정의하면 또 그것이 하나의 기준이 되어 억압기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노자의 도는 누구나 아는 것이기도 하고 너무 평이해서, 백성들이 듣고서 비웃는 것이다.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면 도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도대체 노자의 도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41]. 그렇지 않으면 그 도가 억압의 기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나오는 일화로 도를 이해해보자. 장자에는 도를 터득한 인물인 無無子가 등장한다. 그에게 누군가 도가 무엇인지 물었다. 무무자는 ‘음~음~음~’하다가 말을 하지 못한다. 도는 그러한 것이다. 도를 정의하면 도가 아니기[道可道非常道]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