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임화(3)/ 김상천

중앙교육신문 승인 2022.11.21 10:21 의견 0

나, 외인

자, 우리는 지금 <청년 임화>의 전 단계로 조선이 왜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는지 톺아보고 있다. 조선은 토지문제뿐 아니라 외교에 무능하였기 때문에 망하였다. 과연 그럴까. 이번에는 일본과의 외교 문제에 집중해서 '주의깊게closely' 접근해 보자. 잘 알다시피, 외교란 외부와 접촉하거나 협상을 벌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대등하거나 비슷할 때 야그다.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 봉건제를 폐지하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잘 알다시피, 근대에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은 무론 근대혁명을 성공시킨 미국, 프랑스, 그리고 후발선진국 독일과 이 독일을 모델로 삼아-이것은 당시 독일이 보불전쟁(1870)에서 승리를 거두어 국위를 떨치고 있었고, 냉철한 정치적 현실주의자였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황제 빌헬름 1세를 보좌하여 국운이 융성할 때였으므로 천황의 권위를 드높이려 했던 이토오에게 독일은 좋은 연구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일본의 법제도와 철학은 독일을 그 모델로 하여 탄생하였다"라는 가라타니 고진() 문예비평가의 전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독일 관념 철학이 근대일본의 탄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부록 참조-일본은 강력한 국가주도의 천황제 군국주의를 확립시켰다 이런 명치헌법(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을 기안한 자가 바로 일본의 비스마르크 이토오 히로부미다 그는 또한 네번이나 총리를 역임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초대통감으로 조선의 모든 비극에 그가 간여하지 않은 게 없다.

조선 멸망의 제1막은 1876년 강화도 조약에서 비롯되었다 말이 조약이지 강화도 앞바다에 6척의 군함을 끌고와 위협한 무력에 의한 담판이었다 그 결과로 조선은 부산과 인천, 원산을 개항하고 일본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인정해 주었으며, 일본화폐의 한국 국내유통권을 허락했으며, 일본상품에 대한 무관세를 인정했다 이로 보건대 조선이 근대에 외국과 맺은 최초의 외교적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고, 조약의 내용으로 보건대, 이것은 전혀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계약이고, 정확하게는 근대자본주의 사회로의 이식의 역사임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조선은 일본에 있어서 식량공급지(부산, 인천), 금의 공급지(원산), 즉 일본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을 위한 부의 획득지로서 극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일본연구가의 지적대로, 조선은 수탈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대등하고 우호적인 계약의 주체가 아니었다.

이후, 조선은 열강의 식민지 수탈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82년 2월에 미국, 83년 12월에 영국과 독일, 84년 6월에 이탈리아 및 러시아, 86년 5월에 프랑스에 차례로 이권을 내주게 되었다 일본의 독점적 진출을 두려워한 조선정부의 고육책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조선의 운명이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된 것은 동학혁명으로 인해서였다 그러니까 백낙신, 조병갑 등 지방관찰사의 가혹한 수탈과 학정으로 촉발된 농민반란이 전국적인 농민전쟁이 번지자 정부군으로서는 진압할 방법이 없고 봉건적 지배 자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청군의 출발을 의뢰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일본군에 의한 무력 간섭을-이것은 무론 임오군란의 결과 청 · 일의 군대가 장차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 서로 알릴 것 등을 약속한 텐진조약의 결과다-일으켜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

이후 전개되어 나간 조선의 멸망과 일제 식민화의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정치한 분석을 요구하는 외교적 사안이거니와, 그래도 역사적 교훈을 위해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그 대강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1894~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만주와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역내에서의 일본의 독점적 이익을 반대하는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간섭하여 만주와 조선에서의 헤게모니를 용납하지 않다 보니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청일전쟁으로 얻은 만주와 요동반도를 내줄 수밖에 없었고 조선에서의 패권 또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3국간섭 이후, 복수혈전으로 들끓던 일제는 러시아와의 일전을 대비하고 전쟁준비에 돌입하는 한편으로 조선 조정이 민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러시아에 접근하자 이에 일제는 미우라 공사의 주도 아래 1985년 10월 8일 민비를 살해하는 대담한 죄악을 저지르며 국면전환을 시도하였다 이에 공포를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아관파천), 그러는 사이 일제는 러시아와 조선반도에서의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1(1902), 2(1905) 차에 걸친 영일동맹과 미국과 필리핀과 조선을 상호 인정하는 태프트-가쓰라 비밀밀약(1905)을 통해 일제의 조선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확약받게 됨으로써 한국은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여기, 한국의 운명을 가른 막전막후의 주인공은 바로 이토오였다 그는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마치 프랑스가 온갖 공격적 외교전술을 다 동원하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독일 통일을 저지하려고 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또한 삼국간섭에서 본 것처럼 러시아가 한국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저지하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오로지 외교적 압력을 통해서만 독일통일을 완수할 수 있음을 비스마르크처럼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1853~1856), 이에 반대한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고 힘의 공백이 발생한 사이 프랑스를 침공, 독일통일의 발판을 삼은 것을 전례 삼아 삼국간섭이 주춤해진 사이 이토오는 영국, 미국과의 동맹을 지렛대로 삼아 러시아를 침공, 한국에서의 일제의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그는 협상과 결단의 귀재였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한국은 외교권이 없는 실질적인 식민상태로 전락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고, 제1대 통감으로 이토오 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자, 그렇다먼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 나라를 잃고 제 민족이 죽어나가는 판국에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 가만히 있것는가 우리 또한 우리 스스로의 역량으로 근대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내재적 역량을 지녔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은 첫째, 북학파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1884)이요, 비록 종교라는 외피를 두루고 있었지만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갑오농민전쟁과 위로부터의 개화지식인에 의한 갑오개혁(1894), 그리고 서구적 지식인그룹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1896), 그리고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한 항일의병투쟁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근대 개혁을 위한 조치들과 침략자에 대한 저항은 보수세력의 배신, 일제와 손잡은 수구세력들의 술수,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제의 신식무기에 의해 번번히 좌절, 잔인하게 제거, 초토화되었고,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투쟁은 더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그 중심의 중심에, 잔혹드라마의 막후에는 일제의 냉혹하고 잔혹한 현실주의 정치가 이토오 히로부미가 있었다.

루카치(<우리 시대의 리얼리즘>)는 기득권층이 위기 시에 느끼는 불안감과 위기감을 ‘이중의 내부적 위험’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새로운 양식의 출현은 많은 외부적인 영향력에 좌우되며, 문학의 역사에서 종종 변화의 시기를 특징지웠던 것으로, 한편으로는 어떤 주제에 대한 논리를 수용하는데 대한 저항감이 있을 수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양식에 대한 소심한 집착, 옛 습관의 포기에 대한 저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조선 후기에 기득권층이 마주한 현실인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즉 기득권층은 내부의 변화에 대해 저항하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변화에 대해서도 또한 저항하였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외부의 힘에 의지할 뿐이었다. 대체 조선의 위정자들은 부패하고 무능했을 뿐 아니라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워 이토오가 강대국들과 외교전을 펼치는 동안 조선이 어티케 요리되고 있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 운명의 결정권을 결정적으로 행사하지 모한 채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봉건제도를 지양하지도 모한 채 자본주의 열강 특히, 일제에 의한 식민지로 전락, 끝내 망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이런 불운한 시기에 태어난 임화는 어떤 청년 시기를 보냈는지 간단하게 스케치해보자.

경복궁 근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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