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대울 굴참나무' 외 6편/ 조재훈

하무뭇 승인 2022.07.31 11:05 의견 0

● 삿대울 굴참나무

삿대울 굴참나무 허리에
말이 매었네
녹두장군님 곰방대 불 붙이고
한숨 돌리는 동안
희뜩희뜩 저승 소식처럼
눈발 날리네
장마루꺼정 서너 마장
하마루꺼정 너댓 마장
이인역꺼정 십 리
걸어서 한 시간
경천 성재 밑에 진치고
황토재, 비사벌 휘몰아
와와 몰려온 진달래 함성
하늘 땅 흔들어
예꺼정 달려서 왔네
한 패는 복룡으로 해서 이인으로 빠져나가고
한 패는 주미로 해서 우금티로 치달아 가고
산자락 감돌아 돌아가는 샛길 따라
궁궁을을 시호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죽창 들고 조선낫 들고
꿈틀꿈틀 기치창검 하늘 찌르네
얼어죽고, 굶어죽고
죄 없는 처자식 맞아죽고
살 길은 일자무식 오직 죽는 수밖에 없는
핏빛 샛길,
그 끝에 마냥 화안한 햇살이 올거나
그 끝에 도란거리는 저녁밥상이 올거나
삼례에서, 정읍에서
볏골에서, 줄포에서
강물처럼 나와 몰려든 저 배고픔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을미적 하다가는
개벽천지 새세상 보지 못하나니
곰배팔이도, 청맹과니도
대대로 땅만 파먹던 농투사니도
밥의 평등과 밥의 자유와
땀의 미래를 믿으며
우르릉 우르릉 천둥 되어 달려서 왔네
텃굴 건너 삿대울
굴참나무야
한오백년 살아볼거나
세상은 노상 강한 자의 편,
법 없는 세상에 법이 되어
한오백년 살아볼거나
으흥으흥 말울음 들리네
녹두장군님 활활 타는
푸른 눈빛 보이네
우금티 코앞에 둔
잠 못 이루는 칼날 보이네


● 돈나라, 천국

하느님도
돈 좋아하시는 줄
나는 몰랐네

가난이 질렸는지
부자가 바치는 돈을
마다 않고 받으시고

주는 돈 액수 따라
천국에도 층이 있는지
자리를 각각 약속하시네

가난한 자
복이 있다 하시지만
어디 가나 지옥이네

하느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부처님도 한가질세

삐까삐가
외제차
몰고 온 사장님 마님들

지금도 극락인데
저 세상에서 극락 가려
금은을 바치니

목탁소리 갑자기
커지면서
온갖 복 다 빌어주네

빈자일등이란 말
들어나 보았나
어디 가나 천덕꾸러기라네

(뭐, 이러면
불속
지옥에 떨어져
아귀가 된다구요?)


● 입추(立秋)

성큼
가을이 왔다

나무마다
식욕이 떨어졌다

해도 뭐가 그리 바쁜지
걸음이 빠르다

마른 자갈의
개울에 그림자가 길다


● 개 같은 내 인생

아침일찍 신발끈을 조여맨다
도시락의 김치냄새
하루종일 시키는 대로
허둥지둥 달려야 한다
하루의 양식을 위하여
한끼의 목숨을 위하여
하늘의 구름을 볼 엄두도 없이
무엇 때문에 흘리는지
흐르는 땀에 물어볼 엄두도 없이
뛰어 다닌다
풀어진 신발끈을 다시 조이며
조이자 기름치자
쓸개도 없이 쓰레기처럼
간도 없이 간신처럼
남의 땅을 헤매는
개 같은 내 인생
길은 누구의 소유인가
밤 열두시에야 심야의 열차처럼
간이역에 와 구두끈을 풀어 놓는
눈물어린 밥상
꿈도 없이 쓰러진다


● 덫

어디로 갈 것인가, 만나는 것은 덫뿐이다 홀로 마시는 술잔 속에는 내 눈물의 덫, '여러분' 외치는 말씀에도 덫은 숨어서 히죽거린다 털난 주먹들이 키우는 강철 울타리 여우늑대승냥이끼리끼리몸팔고맘팔고팔고팔고사고팔고싸구려싸구려다 이른 봄 보리밭 이랑을 건너오는 바람은 아직 먼 데서 분다 소중한 저음의 몸살이여, 숨은 소리여, 율도는 어디 있는가, 어디 있는가


● 죄의 시

시를 쓴다는 것, 부끄럽구나
아름다운 말을 골라야 하는가, 시여
일하는 이의 손, 숨어 우는 아이의 눈물
억울하게 눈감은 가슴을 떠나
말을 비틀어 무엇을 짜는가
은행 앞 플라타너스에는
새도 와서 울지 않고
버려진 애가 쓰러져 자는데
버려진 애의 건빵만도 못한
시여, 화려한 것의 문패여
겨울 공사장 헐벗은 일꾼들이
물 말아 도시락을 비우고
둘러앉아 몸을 녹이는
모닥불만도 못한 시여, 부끄럽구나
엘리어트가 어쩌니 라킨이 어쩌니
우쭐우쭐 떠들어대면서
목판의 엿 한 가락만도
못한 시를 쓰는가, 시인이여
고구마로 한겨울
끼니 이어가는 아우에게
시인이라고 자랑할 것인가
흙을 등지고, 땀을 죽이고
먹고 낮잠 자는
외래어의 시를 쓴다는 것
부끄럽구나, 또 부끄럽구나

● 대통령 자전거 꽁무니에 매달리 술통

간밤 소곤소곤
어둠을 적시더니
오늘은 연두빛 봄하늘
종달이 비비 삣종 하늘 높이 날으니
강 건너 불알친구 보고 싶구나
못자리 만들러 논에 나가지 않았을까
돌담 둘러 호박씨랑 상추씨를 뿌리고 있지 않을까
빗소리에 밤새워 이 친구 시를 쓰지 않았을까
만나보고 싶구나
만나서 흘러가는 물에 발을 담그며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싶구나
대통령은 거먹 고무신 페달을 밟으며
개울 건너 다박솔밭을 지나
그을은 얼굴에 뻘뻘 땀을 흘리며
휘파람을 날린다
강물 같은 보리 이랑, 청청한 물 이랑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흔들며
랄랄랄 랄랄랄
달랑달랑 매달린
대통령의 술통
자전거 꽁무니에서
술들은 서로 얼굴 부비며 야, 야 만세 부르고
애기나뭇잎엔 햇살이 반짝반짝
연방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지르니
넘친다, 넘쳐
천지에서 백록담까지
넘친다, 넘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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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훈 시인은 인천에서 태어나 충남 서산에서 성장,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공주사범대 국문과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문학박사). 공주사대부고, 한남대, 공주교대를 거쳐 공주사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냈고, 국립대만사범대 중문연구소 초청교수, 중국 북경대 교육부 파견교수 및 상해 복단대 객원교수 등을 지냈다.

<시맥> 동인(1955~1958), 민족작가회의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김현승 시인 추천 「햇살」 외)을 받았고,『겨울의 꿈』 (1984), 『저문 날 빈 들의 노래』(1987), 『물로 또는 불로』 (1991), 『오두막 황제』(2010) 등의 시집을 냈다. 『한국시가의 통시적 연구』(1996), 『한국 현대시의 숲과 나무』(2002) 등의 연구서와 비평서, 『소리와 의미』(1998) 등의 역서가 있다. 다수의 논문 등으로 고전시가와 현대시를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 활동을 해왔다.

조재훈 시인(공주대 명예교수)
조재훈 문학선집(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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