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민(교사, 작가)

인근 지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행동을 걱정하며 부모님의 양육 태도를 조심스럽게 언급한 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교사의 말을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자신이 아이를 잘못 키우는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의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이 학교 아니면 갈 데가 없는 줄 아세요?”

결국 그 부모는 교사에게 항의했고, 아이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생겼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전학시키면서 담임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했습니다. 조사 끝에 무혐의로 결론이 났지만, 담임교사는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아이들에 대한 지도는 물론, 부모에게 아이의 상황을 전달하는 일조차 꺼렸습니다. 말을 아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택한 생존의 방법은 ‘못 본 체하기’였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일어나는 걸까요? 저를 포함한 많은 교사는 이런 위험이 상존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못 본 체하기’, ‘아무것도 하지 않기’. 이런 분위기가 팽배한 학교에는 과연 평화가 깃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사가 무력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아이는 결코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 피해는 교실 전체로 번지고,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와 부모 역시 결국 피해를 입습니다. 단지 그 시점이 지금이 아닐 뿐입니다.

겉보기에 학교는 평온합니다. 교사들은 여전히 무거운 의무 속에 서 있습니다. 수업을 준비하고, 생활지도를 하고, 행정과 평가를 감당합니다. 원래 교사가 하던 일이니 호들갑 떨 일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이제는 그 일에 쏟을 여력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생활지도와 수업에서 교사는 효능감을 느끼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교사의 잘못으로 특정되고, 비난이 이어집니다. 특히 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 같은 대외활동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교사가 예방했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나 쉽게 나옵니다. 교사는 공동체의 모든 책임을 개인의 도덕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사는 늘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조금 더 해야 한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그 의무의 무게는 어느새 자발성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교사는 여전히 일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일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한편 학교는 이제 ‘권리’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생의 인권, 학부모의 참여권, 교사의 교권까지 모두 법으로 보호받습니다. 하나하나 보면 다 옳은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권리들이 서로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한가운데 누군가는 조율을 해야 합니다.

누가 조율해야 할까요? 교실에서는 교사가, 학교에서는 교장이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선에서 가장 가까이 학생을 만나는 교사들이 지쳐 쓰러지고, ‘못 본 체하기’가 일상이 된다면 아무리 유능한 교장이라도 이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면 다른 누군가의 불만을 감수해야 합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사의 판단은 불신받고, 보고와 절차가 난무하면서 교육보다 행정이 중심에 서게 됩니다. 책임져야 할 행정은 ‘면책을 위한 행정’으로 변질됩니다. 신뢰가 필요한 순간마다 제도가 개입합니다. 결국 교사의 자율성은 더욱 줄어들고, 행동보다 기록이 앞서게 되었습니다. 교실은 조금씩 조율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그 사건으로 돌아가 봅니다. 무혐의로 결론이 난 교사가 다시 수업을 시작했을 때, 아이들은 여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무혐의가 되었으니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교육에 힘쓸까요? 아닙니다. 법은 그를 지켜주었지만, 신뢰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저라도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괜히 말했나. 그냥 모른 척할 걸.”

이렇게 교사는 하나의 사건으로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워갑니다. 판단하지 않는 교사, 개입하지 않는 교사, 그리고 결국 침묵하는 교사. 교육의 온도가 가장 먼저 식는 순간입니다.

이제는 교사에 대한 ‘인정’에서 교사에 대한 ‘존중’으로 옮겨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매우 심각한 시기이며, 교육의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잘했다는 칭찬보다 더 절실한 것은, 버티고 있는 교사에게 건네는 존중의 말입니다. 성과로 존중받을 교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악조건 속에서도 아이 곁을 지키며 하루를 버티는 교사를 믿어야 합니다. 존중은 완벽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신뢰의 약속입니다. 교사가 완벽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최선을 다해 조율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주는 일입니다. 그 믿음이 교사의 자발성을 다시 일으킵니다.

지금의 학교는 권리가 넘치지만, 공공의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지만, 그 옳음이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공공의 가치를 다시 세우려면 먼저 교사를 믿어야 합니다. 교사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자기 아이의 미래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교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육의 마지막 조율자입니다. 지금은 교사를 평가할 때가 아닙니다. 그들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진심 어린 존중으로 숨을 불어넣어야 할 때입니다. 존중은 격려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교사는 다시 마음을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