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진로진학교사)
사람들이 AI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눈다. 나 역시 그런 대화를 나눈 일이 많고 즐겨보는 유튜브나 광고 등의 알고리즘도 거길 향해있다. 그런데 그 대화는 AI의 현주소와 발전 전망 등의 내용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끝낼 경우 무언가 빠뜨린 느낌이다. 빠뜨린 무언가는 무엇일까? 바로 ‘일자리’에 관한 내용이다. 신기술과 신문명에 대한 담론은 대부분 그것이 어떤 일자리를 만들고 없앨 것이냐로 귀결된다. 우린 AI로 누릴 혜택 외의 가장 큰 불안으로 일자리의 상실을 든다. 그러다 보니 미래 사회의 전망을 다루는 각종 교육이나 연수, 그리고 설명회에 빠지지 않는 주제는 AI와 함께 ‘일자리’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의 대화에서도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일’에 관한 내용이다. “그래,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일은 어때?” 덧붙여 명절 때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 사이에 “그래 취직은 잘했고?”와 같은 참기 힘든 질문은 금기어이다. 그러한 대화들 속에 삶의 현실을 녹여내고, 각자의 취향과 기호를 담아내며, 가치관과 철학, 그리고 정치색과 세계관까지 드러낸다. 그것을 생계유지 수단 정도 이상의 취미나 여가 활동으로 확대하면 과연 우리에게 ‘일’이 없는 삶은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비로소 ‘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라는 사실과 ‘모든 삶은 곧 일이다.’라는 명제에 다다른다.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곧 우리는 일하는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출근하며 매일 반복되는 일들 속에 때때로 묻는다. ‘이 일을, 나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진로 교사로 전과(轉科)를 한 후 새로운 일에 적응과 도전하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무료함이 다시 고개를 든다. 인간이 적응력을 갖지 않았다면, 무언가에 싫증을 느끼지 못했다면, 문명의 발전은 없었으리라. 그러한 생각을 하며 익숙함이 주는 무기력을 위로한다. 언제나 부러운 사람은 늘 자기 일에 지치지 않는 열정을 품은 이들이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자기 일을 야무지게 마무리한 후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일과 여가가 각자의 자리에서 마땅한 빛을 발하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난 그 장면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지만, 일 그 자체의 보람과 그로부터의 휴가가 주는 꿀맛 같은 경험이 언제나 요원했다. 그래서 공허해진 마음을 극복할 수 없었고, 삶은 뿌듯한 업적일 수 없었다.
명색이 일과 삶을 가르친다는 사람이 일로부터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점은 얼마나 부끄럽고 미안할 일인가. 아이들 앞에서 자신할 수 없는 빈약한 자화상을 지니며 가르침이란 과업을 짊어진 채 고뇌한다. 그러나 내 앞의 회피할 수 없는 일 중 상당수는 언제가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밀려오는 것들이다. 피하고 싶어서, 언젠가 퇴직한다고 하여도 그 이후의 생활 속 일은 지금보다 막막하다. 숨을 쉬는 동안 과연 어떤 일들로 행복한 삶을 밀고 나갈지는 쉽지 않은 숙제이다. 그렇기에 정해진 일터에서의 삶이 그나마 미려하다. 은퇴는 쉽지 않은 또 다른 도전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라 목구멍이 대웅전이다.
중3 남학생이 찾아왔다. 아이는 이과 분야를 희망하며 어느 고등학교에 가야 좋을지 고민 중이었다. 나는 애써 그 아이의 성적이나 학생부를 보지 않았다. 다만 직업 흥미 검사와 적성 검사 그리고 학습 코칭 검사를 통해 종합적으로 아이를 판단해 보았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아이의 성향을 이해하려 하였다. 언어 이해 부분이 다소 약하며 전반적으로 이과 성향이 강한 적성 검사 결과를 보였고, 흥미 유형에서는 탐구형과 현실형이 모두 강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공학 계열이 가장 적합한 진로로 보였다. 대화할수록 아이가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공학 계열만 해도 얼마나 넓은 분야인가. 대화는 짧게 끝날 수 없었다.
공학 계열의 어떤 분야가 맘에 들지 막막한 아이에게 학과별로 공부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대학 학과 홈페이지에서 함께 찾아갔다. 거기서 교육 과정을 보고, 학과 설명과 전망까지 확인한다. 만일 건축공학을 공부한다면 우리나라 건설사가 전 세계에서 이룬 성과들을 보여주며 공부가 현실화한 구체적인 모습들을 알려줬다.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칼리파’,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카타르에 있는 ‘카타르 국립 박물관’ 같은 건물의 사진에 아이는 흥미를 갖는다. 그리고 건축학과와 건축공학과 그리고 예전에 토목공학과로 불리던 건설환경공학과들의 차이를 설명한다.
만약 기계공학을 공부한다면, 자동차 회사도 있지만 다른 종류의 회사를 알려준다. 계획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에 따른 대화이다. “요즘 한화 이글스가 야구 잘하지?” 아이들이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세태를 활용한 질문이다. “근데 한화가 이전에 계속 성적이 안 좋았을 때도 왜 시즌 마지막 경기 후 화려한 폭죽으로 유명할까?” 나는 한화가 ‘한국화약 주식회사’라는 방산업체였음을 말해준다. 매년 여의도에서 열리는 ‘세계 불꽃 축제’ 주관사 역시 한화그룹이다. 성인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아이는 흥미를 느낀다. 그 한화그룹의 계열사로 최근에 유명세를 떨치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홈페이지를 함께 열어본다. 거기엔 로켓 발사체, 비행기 엔진, 그리고 방산 기업의 자회사다운 자주포와 잠수함의 부품까지 기업의 사업 분야가 소개되어 있다.
“멋있는데요.” 순하고 진중한 여드름 꽃 핀 중3 남학생의 입가에서 살며시 새어 나온 말이다. 나는 공학을 공부해서 어떤 진로를 열어갈지 선생 이전에 그저 삼촌 같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내일은 시간을 내어 학교 도서관을 찾아가 공학 분야의 책들을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성적과 학교 활동을 토대로 적합한 고등학교 선택은 추가 일정을 잡자고 말하며 상담을 마무리한다. 정리한 자료를 출력해 주고 교실로 돌아가는 아이의 인사를 받은 후 생각한다. 이 작은 보람이 내 일의 의미라면,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을 통해 그나마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을, 거창한 성과와 업적이 아니어도 일이 주는 소소한 보람과 울림이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진로와 직업과 일의 조각으로 채워지는 삶은 헛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이다. 끝으로 그 아이를 떠올리며 나도 속으로 되뇐다. “그렇지! 멋있었구나. 그리고 고맙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100회 대장정의 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