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교사)
새로운 제도가 전면 시행된 첫해이다. 그 제도는 ‘고교학점제’.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은 새 제도가 안겨주는 축복(?)을 만끽하는 중이다. 그것은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변화에 따르는 약간의 진통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중학교까지 울려 퍼지는 불안감을 전한다.
엄밀히 말하면 고교학점제를 탄생시킨 ‘2022 개정 교육 과정’은 아직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이다. 진짜는 내년, 올해 고1 학생들이 본인이 들을 과목을 직접 선택하여 듣는 2학년 때 나타날 예정이다. 아직은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학교 지정 과목으로 기초 교과들을 모든 학생에게 듣게 하고 있다. 이동수업이 거의 없는 상황, 그러나 활화산이 폭발하기 전 긴장된 휴지기이다. 제도를 비판하는 입장은 얼마나 편리한가. 그러나 아무리 좋은 취지로 만든 제도일지라도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미봉책은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양산하는가. 고교학점제에 관해 편하지만 즐겁지는 않은 비판을 몇 가지 해본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기초 소양과 기본 학력을 바탕으로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누적하여 졸업하는 제도’이다. 저 설명은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기초 소양과 기본 학력을 어디까지 갖추어야 졸업을 시키느냐이다. 교과목당 40% 미만의 성취율을 보이면 미이수(F 학점)를 받아 보충 활동을 해야 한다. 192학점을 채우지 못하면 유급이 되거나 졸업을 못 한다. 거기에 과목마다 출석 시간의 2/3를 채우지 못하면 역시 이수를 할 수 없다. 이게 의미하는 건, 잦은 지각생이나 예체능 활동을 위해 조퇴하는 학생들이 기존처럼 출석 일수 2/3를 채워도 유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그렇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이다. 이미 시행 전부터 수많은 홍보를 통해 미이수 여건이 알려졌다. 학부모님들은 혹시나 자녀들이 졸업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컸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아이들이 졸업하지 못하는 상황은 출현하지 않을 것 같다. 성적이든, 출석이든 보충 과정을 거쳐 이수할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생은 선생님들의 몫이다. 아이들은 대학생처럼 성인이 아니다. 책임지게 할 수 없는 걸 뻔히 예상하면서 저런 기준이 겁만 주는 엄포 이상의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실질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다음 자신의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라는 제안이다. 이게 편안하게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의 과목을 선택해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는 정도를 기대한 것이라면 시쳇말로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제도가 시행되기 수년 전부터 대학들이 제공하는 필수 이수 과목과 권장 이수 과목 목록을 보라. 예를 들어 공학계열로 가겠다는 아이가 물리학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실책이다. 그러면 교과 전형과 수능으로 도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요 대학들이 내신 5등급 약화와 통합 수능의 변별력 감소를 핑계로 모든 전형에 학생부 정성적 요소를 포함하겠다는 취지를 보면 그마저 쉽지 않다.
게다가 이전에는 한 학년 동안 들었던 일반선택 과목을 한 학기에 들어야 하므로 절반 정도의 시간만을 듣고 이수해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당 보통 세 과목 정도를 한 학기에 지도해야 하는 엄청난 수고로움이 발생하고, 매 학기가 끝나면 아이들의 학생부 과세특을 써줘야 한다. 아마도 고등학교 교사들의 여름방학은 상당 기간 학생부 작성으로 할애될 것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지망하는 대학의 학과에서 요구하는 이수 과목들을 학교 교육과정에 있음에도 선택하지 않았을 때 입시에서 받는 불이익이다. 그러니 이전보다 더욱 자신의 진로를 확고히 하라는 압박이 커진다. 물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무전공 입학이나 자유전공학부와 같은 공간을 확대하겠다고는 하지만 거긴 교육부가 손쉽게 전공을 확대할 수 없는 학과들을 위해 마련된 영역임이 밝혀져 주로 이공계 지망의 학생들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눈 가리고 아웅인 식. 자신의 진로를 고1 때 명확히 정해야 하는 게 그 이전의 어떤 제도에서 이 정도로 요구되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그러니 중학교 3학년에 이른바 ‘진로 연계 학기’를 권장하며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주문하는 추세이다. 가히 선행학습 영역에 ‘진로’도 들어가야 할 판이다. 국·영·수·‘진’의 신세계가 열렸다.
학생들의 불만, 학부모들의 원망, 선생님들의 노고를 감안하면 도대체 교육 3주체가 모두 바라지 않는 제도의 의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언론과 유튜브를 보면 심지어 사교육 담당자들마저 비난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각종 입시 설명회와 학원 설명회는 전례 없이 성업 중이다. 복잡계로 들어갈수록 사교육에 기대는 사람들의 마음은 커진다. 입시 관련 유튜브 채널의 호응에 뒤처질세라 일부 종편 TV에서는 일요일 저녁 시간을 할애해 우리말 ‘선생님’의 영문 타이틀로 입시 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그 프로엔 일명 일타 강사들이 나와 신처럼 강림하고 조언한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사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 어림잡아 100만이 넘는 나라인데.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는 무시할 수 없는 산업 영역이다. 그냥 우리 사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들어진 제도가 바뀌려면 몇 년이 지나야 한다. 그리고 후퇴는 거의 없다. 강남에 살아도, 변두리에 살아도, 지방 농어촌에 살아도, 모두가 불안하다. 그렇기에 아쉬운 마음을 담아 힘들어도 버텨보자며 진로 교사로서 몇 가지 팁을 전하고 글을 맺는다. 바로 고등학교 교육과정 편제표 읽기이다.
일단 1학년 때 학기당 29학점을 초과해서 편성되어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게 공통 국·영·수와 통합사회/과학을 4학점으로 듣기 위함인지 아니면 예체능이나 기술/가정 또는 정보 과목을 듣기 위함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공부의 양이냐, 무리하지 않는 1학년이냐를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3학년 2학기에 학교 지정 과목 배치 여부를 봐야 한다. 만일 국·영·수에 그런 과목이 있다면 우리 학교는 수능 전까지 최선을 다해 국·영·수를 가르쳐요라는 의미가 있지만 달리 보면 수능을 앞두고 상대평가 과목의 부담을 덜어주지 않는, 융통성이 약한 학교로 보일 수 있다. 일부 자사고와 자공고에서는 수학 교과 수능 과목을 2학년 때 모두 마치는 교육과정을 갖고 있다. 학생들의 학업 부담이 과중할 수 있기에 선행 학습 등을 요구한다. 결국 견딜 수 있는 자가 버티게 된다. 물·화·생·지 4과목을 모두 선택할 수 있는 학교면 과학 중점고일 가능성이 높고 혹은 이과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많이 확보한 학교일 수 있다. 끝으로 경제 과목 외에 경제수학 등의 과목이 있어서 상경 계열 진학을 희망하는 아이들을 배려했는지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좋다.
정말 고교학점제가 잠자는 교실을 깨우고, 듣고 싶어 설레는 과목을 선택하고 배우며,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돌보는 사람 모두가 행복해지는 제도가 되길 바란다. 아니, 다른 제도라도 그런 결과를 만드는 제도가 꼭 나오길 바란다. 최대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