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영(신일중학교 교사)
띠링~!
“고양시에서 실종된 ○○○씨(여, 85세)를 찾습니다. 154cm, 46kg, 검정계열잠바, 녹색바지, 흰색벙거지모자, 손에투명비닐봉투소지. vo.la/*****/☎112[경기북부경찰청]”
언제부턴가 안전 안내문자(재난 안내 문자)가 일상이 되었다. 누군가의 책임을 모두의 책임으로 나누면 담당자는 안심할 수 있지만 불안은 한두 명의 몫이 아니다. 동시에 실종 문자를 보면서 고령의 부모님을 떠올리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에게는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멈칫하며 그나마 작은 관심을 보탠다. 이 짧은 메시지에 담긴 가족의 안타까운 걱정에 잠시 공감하는 것으로 기약없을 기다림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서 간혹 날아오는 무사한 귀가 메시지에는 안도와 기쁨이 전해진다. 그나마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기에 나에게도 아직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있음을 확인한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에서 “어째서 언론은 어두움에 그렇게 과도하게 초점을 맞출까? 어째서 잔인함에 그렇게 초점을 맞추면서 희망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 걸까?”라고 물으며 일상의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현실의 부정적 측면에 천착하는 미디어의 민낯을 질타한다. 그러면서 뉴스 소비자에게 그것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 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사건·사고와 누군가를 비난하는 정보는 그 반대의 정보보다 훨씬 파급력이 크다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은 오래전부터 가르쳐 왔다. 하물며 지금은 그런 뉴스들이 손끝에서 수시로 전해지는 초 전달 사회이다. 불안과 걱정의 정보를 덜어내려 애써도 시원찮을 판에 국가가 앞장서서 보내는 안전 안내문자(재난 안내 문자)는 그것들을 증폭하고 일상화시킨다. 순기능이 있는 걸 인정하지만 신중하지 못한 문자들에 짜증이 나는 이유이다. 증폭된 불안은 사람들의 걱정을 키운다. 비로소 ‘불안 사회’, ‘걱정 사회’라고 불릴 만한 충분한 여건이 만들어진다.
우울증 환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 문제를 오래전부터 경고해 왔고, 2030년에 닥칠 거라 예상했던 사태가 2017년에 벌써 닥쳤다고 보고했다.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이 신체 질병을 밀어내고 가장 많이 겪는 건강 문제 1위에 올랐다. 불과 10년 만에 우울증 환자가 거의 20퍼센트나 증가했다. 불안장애는 우울증보다 훨씬 더 흔해졌다(‘걱정 중독’, 롤란드 파울센, 2024).
특정 수준부터 한 국가의 경제성장과 삶의 만족도 사이의 연관성이 점점 약해진다.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연관성이 거의 사라진다. 부자들이 이상 행동을 하는 심리적 근거이다. 아직 부자가 돼 보지 못해서 알 길이 없지만 돈이 많은데 더 탐하거나, 싸우거나,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정도의 부를 넘어서면 역시 싫증이 나겠구나 싶다. 그러니 개인도 그럴진대 국민소득이 높은 잘사는 나라에서 유독 풍요에 반하는 정신적 고충의 사례들이 많은 게 이해가 간다.
‘총, 균, 쇠’에서 일찍이 주장하듯, 우린 농경시대에 들어서면서 서로 갈라치고 억누르며 고민이 많아졌다. 수렵과 채집은 자연을 그대로 향유하는 활동이었다. 거기엔 농경 사회만큼의 계획이 필요 없었다. 계획하지 않는 삶의 힘은 강력했다. 그러나 기술 개발로 육체적 억압을 탈피하니 자유로운 정신은 계속 ‘반사실적 사고’를 하고 걱정을 사서 하게 된다. 거기에 자유주의 철학의 대두로 모든 책임을 ‘개인’이 져야 하는 시대가 펼쳐졌다. 일어날 위험이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자유의 현기증’이 발생한다.
선택의 자유가 늘어나면서 잘못 결정하고, 실패하고, 나락에 떨어질 위험이 생겼고, 공동체가 붕괴하는 와중에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 정도 여건이면 걱정이 없는 게 비정상인 세상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걱정’과 ‘불안’을 떨쳐내고 속 편히 한평생을 살 수 있을까? 앞서 소개한 책 <걱정 중독>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본다.
우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설문에서 ‘행복’을 물으니 자녀가 없는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면, ‘의미’를 물으니, 자녀가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더 좋은 것처럼.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구체적인 경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비고츠키의 동료인 러시아 심리학자 알렉산더 루리아가 농부들과 나눈 대화에서, 산업 사회와 자본주의의 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현실에 젖어있는 삶을 사는지 알 수 있다. 땅바닥에 굳건히 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현대 도시인에게 부러움을 일으킨다. 단, 정신적인 부분에서만 그런 점은 한계이다. 결론은 ‘현실을 살아라! (Seize The Day!, Carpe diem!)’이다.
높은 곳이 두렵지 않아서 일을 잘하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고 현재에 집중했더니 어느덧 두려움이 작아졌다는 모호크족의 얘기처럼, 생각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생각을 관찰하며, 삶 자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불안을 없애려 안달하지 말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무상(無想)의 추구와 불확실성의 인정이 삶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덧붙여 개인의 경우만으론 부족하다. 사회 공동체가 함께 불안과 걱정을 떨쳐낼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 단순한 생각에 머물지 말고 ‘정말로 무언가 실천’해야 가능하다. 우선적으로 분배의 정의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관계가 붕괴되고 비교와 차이가 극심한 상황이 해소되어야 한다. 부자들과 기득권의 못된 짓이 사회의 불안과 걱정을 키운다. 불평등은 강력한 사회 불안의 자양분이다.
끝으로 공론의 장이 진정성 있고 투명하며 합리적이어야 사회적 모순과 불안의 해소가 가능할 것이다. 진짜 무서운 공포는 언제나 드러나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으며 몰상식하다. 우린 모두 경험했지 않은가!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에 정작 안전 안내문자(재난 안내 문자)는 울리지 않았다.